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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초기제지업으로 활동떼돈 벌어===
본적은 경북 영덕이며, 아버지의 이주지인 [[평남]] [[안주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경북]] [[영천시|영천]]에 정착하여, 경북 지역을 생활 터전으로 삼았다. 영천과 [[영덕군|영덕]]에서 영세한 사업을 운영하였으며, 점차 자본을 모아 1907년 제지 공장을 열고 제지업에 뛰어들었다.
 
1907년 영천 경찰서장의 보증을 등에 업고 문명기는 자기 자본의 10배나 되는 금액의 종이를 외상으로 매입할 수 있었다.<ref name="cigichos">[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2&no=337707 食神生財 …베풀어 인심을 사면 돈은 따라온다]</ref> 당시 경북 영덕에서 청송 가는 길에 지품면(知品面)이 있었는데, 이 지품면에는 속곡, 눌곡이라는 유명한 한지 생산지가 있었다. 한지 원료인 닥나무가 많았던 것<ref name="cigichos"/>이다. 1912년 [[만주]]와 화북을 다녀온 뒤 중국으로 제지수출로, 막대한 돈을 벌 것을 예상하며, 대형 제지회사 겸 무역회사인 한문양행을 설립하였다.
 
=== 제지업과 광산업 투신 ===
경술국치 이후 왜정시대 지품면 사람들은 이 종이를 만들어 판 돈으로 영해 들판을 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문명기는 한지를 몽땅 구입해 놓고 팔리기를 기다렸지만, 한지를 구입해가던 중국 상인들이 태클을 걸었다. “시세의 반값이 아니면 안 사겠다”고 중국 상인들이 버텼다.<ref name="cigichos"/>
 
이 상황을 예의 주시하던 문명기는 세게 나갔다. “반값에는 절대 안 팔겠다. 차라리 불에 다 태워버리겠다.” 실제로 장작에 불을 피워놓고 한지 다발을 던지기 시작하는 장면을 보고 중국 상인들은 문명기의 말이 엄포가 아님을 깨달았다.<ref name="cigichos"/> “제대로 가격 쳐줄게.” “아니야. 나 너희들 하는 행동에 열 받아서 장사고 뭐고 다 태워버릴 거야.” “부탁이야. 팔아줘.” “그렇다면 따따블로 값을 쳐 줘.” 이렇게 해서 문명기는 정상 가격의 몇 배를 받고 자신이 거의 독점하고 있던 한지를 중국인에게 팔았다.<ref name="cigichos"/>
 
=== 풍자어 사바사바의 원조 ===
문명기는 1달에 2~3번씩 경찰서장 집 대문 고리에다가 청어 꾸러미를 걸어놓고 사라지곤 했다. 이걸 몇 번 받아먹던 일본인 서장은 ‘누가 이 청어를 갖다 놓고 사라지는가’ 궁금했다. 마침내 그 주인공이 조선인 문명기라는 생선 장수임을 알게 됐다. “당신은 왜 내 집에다가 청어를 매번 갖다 놓았느냐?” “저는 영천시장에서 생선을 팔아 재미를 봤습니다. 다른 지역의 시장에서 생선을 팔 때는 치안이 좋지 않아서 깡패들에게 세금을 많이 뜯겼는데, 영천은 치안이 확보돼 뜯기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천 경찰서장님께 고마운 마음이 들었고, 깡패들에게 뜯기지 않은 만큼을 서장님께 현물로 갖다드려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ref name="cigich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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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오가며 무역을 하던 이 즈음부터 일제와 밀착하여 사업 확대에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다. 사업은 나날이 번창했고 문명기는 제지업과 수산업을 함께 운영하면서 금광에도 투자하여 성공함으로써 도내에서 알아주는 큰 부호가 되었다. 문명기는 제지업에서 번 돈을 갖고 1932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광산을 인수하였다.<ref name="cigichos"/>
 
=== 지방자치의원비행기 활동헌납운동 ===
1920년부터 1933년까지 [[경상북도]] [[도평의회]] 의원(1920년, 1924년, 1930년에는 민선 [[도평의회]] 의원, 1927년에는 관선 [[도평의회]] 의원으로 임명됨) 등을 지내면서 지방의 유지로 활동하던 문명기는 1935년 [[비행기]] 구입을 위한 거액의 국방헌금을 기부하였는데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이를 어느 독지가가 보내온 "애국의 지성(愛國의 至誠)"이라며 크게 보도하고 헌납식까지 열면서 선전함으로써 그도 전국적인 친일파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935년 10월 자신이 경영하던 영덕금광에서 발견한 두꺼비 모양의 금덩어리를 일왕에게 헌납했으며 문명기가 기증한 비행기에는 "문명기 호(文明琦號)"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1939년 8월 북지위문 경북도회의원 광제회(廣濟會)의 대표로 중국 화북과 만주에 있는 일본군을 위문하고 돌아왔다. 그는 이때 이미 자살 폭격을 옹호하는 선구적인 친일 활동을 했고 [[조선국방비행헌납회]]를 조직하여 비행기 헌납 운동을 벌였으며 여러 곳에 강연을 다니며 침략 전쟁을 지원할 것을 역설하거나 중국 전선의 부대를 방문하여 군인들을 위문했다.
 
=== 일제광신도적인 강점기 후반친일행각 ===
일제가 중국을 한창 침략하고 있을 때 그는 국방비를 거듭 헌납하고 [[의용단]] 모집에 앞장섰으며 자신이 경영하던 광산을 팔아 조선군사령부에 비행기 한 대를 헌납하였다. 그는 총 2대를 헌납한 것으로 나온다.<ref>{{저널 인용
|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1074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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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인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함에 따라 같은 해 1월 24일 영덕군에 있는 자택에서 전격 체포되어 기소되었다. 그러나 그해 5월 25일 고령임을 이유로 [[보석]]을 신청, 곧 보석으로 석방되었고 반민특위가 강제로 해체되면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문명기는 90세까지 장수했으며 1968년 10월 6일에 사망했다. 묘가묘는 영덕군 강구면에 있는데있다.

1969년 8월 15일에 만들어진 묘비문은 노산 [[이은상]]이 썼다. 묘비문에는 문명기(본명 문기섭, 창씨명 文明琦一郞)를 '세상에 나서 자기 힘으로 성공하기란 어려운 일이요 또 장수하며 어진 행적을 끼치기는 더 어려운데 그 어려운 일을 능히 행하여 스스로 보람찬 생애를 누린 이'라고 치켜세우면서 '장손 의학박사, 국회의원 태준을 비롯하여 내외손 50여 명이 제제 명사들이라, 이로써 덕을 쌓은 집에는 자손이 복을 받는다는 옛말이 빈말이 아님을 알겠다'라고 썼다. 묘비문에는 일제치하 문명기의 친일 행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ref>{{저널 인용
|url=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585703
|제목=[인물추적 이은상] (14) 3·1운동 기념탑과 친일파 문명기의 묘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