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시황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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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문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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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
|재위 = 기원전 220년-기원전 210년 9월 10일
|즉위식 =
|전임자 = (신설)
|후임자 = [[진 이세황제|이세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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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2 = [[진 (영성)|진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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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자2 = [[진 장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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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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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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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기원전 259년 2월
|출생지 = [[조 (전국)|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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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지 = [[진나라|진]] 사구(沙丘; 오늘날의 [[허베이성]] [[핑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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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 = [[진나라|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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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 [[조희 (진 장양왕)|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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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장남 [[부소]]<br />
|친인척 =
|종교 = [[법가]]
}}
'''진 시황제'''({{zh
[[기원전 246년]]부터 [[기원전 21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기원전 246년]]부터 [[기원전 241년]]까지 [[여불위]]
▲[[기원전 246년]]부터 [[기원전 21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기원전 246년]]부터 [[기원전 241년]]까지 [[여불위]](呂不韋)가 섭정을 하였고 [[기원전 241년]]부터 [[기원전 210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을 하였다. [[불로불사]]에 대한 열망이 컸으며, 대규모의 문화 탄압 사건인 [[분서갱유]]를 일으켜 [[수 양제]]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대의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도량형]]을 통일하고 전국 시대 국가들의 장성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 제도와 군현제를 닦음으로써, 이후 2천년 중국 황조들의 기본틀을 만들었다. 전근대의 중국에서는 특히 유학 관료들에 의하여 폭군이라는 비판을 계속 받았으나, 오늘날 [[중국]]에서는 [[병마용]] 발굴 이후부터 시황제의 진취성과 개척성에 초점을 맞추어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 초기 생애 ==
[[기원전 259년]]
그러나 [[사기 (역사서)|사기]] 본기에는 ‘진시황은 [[진 장양왕|장양왕]]의 아들이다’라고 분명히 서술하고 있고, 사기집해에 따르면 ‘[[진 장양왕|영자초]]와 [[조희 (진 장양왕)|조희]]가 혼인한지 12개월 뒤에 영정을 낳았다’고 하고 있으니, 혼인 후에 바람을 피운 것이 아니라면 생물학적으로 여불위는 진시황의 아버지가 될 수 없다.
곧 태자에 책봉되었지만,
== 여불위와의 분쟁 ==
새로 진나라 왕이 된 시황제는 친정을 할 수 있는
이에 조씨는 노애와 함께 수도 [[함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거처하였다. 하지만, [[기원전 238년]]에 시황제가 성인식으로 잠시 함양을 비우자, 노애가 반란을 일으켰다. 소식을 들은 시황제는 곧바로 군사를 파견하여 노애를 [[능지처참]]에 처하고 어머니 조씨를 감금하였다. 노애와 조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2명도 살해하였다.
그리고, 시황제는 여불위를
== 전국 통일 과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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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황제 ==
시황제는 국왕(國王)
시황제는 승상 [[이사 (진나라)|이사]]의 의견을 따라 [[군현제]]로 나라를 다스렸고,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고, 군마다 수(행정 장관), 위(사령 장관), 감(감찰관)을 두었다. 또한, 천하의 부호 12만 호를 함양으로 이주시켜 천하 제일의 산업도시가 되어 발전하면서 그들을 철저하게 감시했다. 그리고 황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함양궁을 제2궁전,제3궁전이 회랑으로 이어져 웅대한 궁전으로 바꾸고, 전국의 농민을 사역에 동원하여 인해전술로 폭 50m의 황제 전용 도로를 만들었다. 시황제는 자기를 역사상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낸 천재라고 생각하여, 고관에게 정무를 맡기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법은 시황제가 모두 정하고, 결재도 혼자서 했다. 그래서 상소는 함양궁에 산더미처럼 쌓여졌다. 상소는 저울로 달아졌고, 결재량은 하루에 1석(
== 분서갱유와 폭정, 대토목공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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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기원전 212년]], 시황제는 [[방사]] [[후생]]과 [[노생]]에게 불로장생의 약을 가지고 오라 명하였으나, 도리어 그들은 시황제를 비판하며, 도망쳐 버리자 화가 난 시황제에게 조정 안에 수상한 학자가 일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학자들은 모두 자기가 아니라며 잡아뗐으나 시황제는 이들을 모두 잡아들였으니, 그 수가
시황제는 북방에 흉노의 침입을 염려하여 대장군 몽염에게 서쪽으로 임도로부터 동쪽으로 요동까지 그 유명한 [[만리장성]]을 쌓도록 명했다. 이 만리장성에 동원된 인부가 150만여 명이나 되었고, 그 중에서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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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로 불사의 꿈 ==
[[파일:Xian museum.jpg|
어느 날 시황제의 행차는 낭아산에 도착했다. 시황제는 그 풍경이 맘에 들어 3개월 정도 머물렀는데 갑자기 그곳에서 이상한 것을 보았는데 한 섬이 갑자기 나타나자마자 희미하게 사라져 갔다. (오늘날의 신기루라고 추정하고 있다.) 어느 날 제(산둥성)에 살고 있는 서복이라는 방사가 시황제가 보았던 섬은 전설상의 봉래산 이었다고 주장하고는 봉래산에서 불로불사약을 구해오겠다고 했다. 서복이 갈 배에는 수많은 보물과 소년소녀 3000명이
== 가족관계 ==
시황제의 후궁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다만 사후 이세황제가 후궁들 중 자식을 낳지 않은 자는 모두 따라 죽게 하였고, 그 수가 매우 많았다는 기록이 있어 상당히 많은 수의 후궁을 두었을 것으로 생각된다.<ref>사마천, 《사기》 권6 진시황본기: 二世曰:「先帝後宮非有子者,出焉不宜。」皆令從死,死者甚衆。</ref>
* 부황 : [[
* 모후 : [[조희 (진 장양왕)|조희]](趙姬)
* 동생 : [[
* 자녀
** 장남
**
** 3남:[[공자 장려]]
** 막내:[[진 이세황제]]
<!--이하 내용은 야사가 아니라, 작가의 픽션 아닙니까????.....
=== 황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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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로 코엘료, 《흐르는 강물처럼》 203 ~ 205쪽}}
-->
== 전국 순행 ==
[[파일:Terracotta army xian.jpg|
시황제는 재위 기간 중 무려 다섯 차례씩이나 전국 곳곳을 순행하였다. 그러나, 이런 때에 많은 협객이 폭군 시황제를 죽이려 하였다. 그리하여 시황제는 순행 시, 언제나 5개의 수레를 군사들이 호위토록 하고, 자신은 그 수레 중 하나에 탔다. 시황제가 자신을 죽이려 드는 협객을 얼마나 두려워 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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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10년]] [[음력 7월 22일]], 진시황제 영정은 50세의 나이로 붕어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자신이 만든 지하궁전인 여산에 묻혔다. 이 능묘는 [[1974년]] 우물공사를 하면서 부장품인 병용(군사모양의 인형)과 더불어 발견되어 지금도 발굴 중이다.
그러나 이사와 조고, 호해는 시황제의 죽음을 숨겼으며 시황제의 시신이 있는 수레 옆에 절인 생선을 같이 운반하여 시신 썩는 냄새가 들키지 않도록 했다. 조고는 시황제의 유서를 조작, 황태자 부소와 몽염에게 자결을
== 진 시황제를 소재로 한 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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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
{{위키공용분류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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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임후임|
|전임자 = (초대)
|후임자 = 18남 [[진 이세황제|이세황제]] 호해
|대수 = 1
줄 206 ⟶ 208:
|임기 = [[기원전 221년]] ~ [[기원전 210년]]}}
{{전임후임|
|전임자 = (초대)
|후임자 = [[진 이세황제]] 영호해
|직책 = [[중국의 황제|중국 황제]]
|임기 = [[기원전 221년]] ~ [[기원전 210년]]}}
{{진나라의 황제}}
{{진나라}}
{{기본정렬:시황제, 진}}▼
{{전거 통제}}
▲{{기본정렬:시황제, 진}}
[[분류:기원전 259년 태어남]]
[[분류:기원전 210년 죽음]]
줄 219 ⟶ 224:
[[분류:암살 미수 생존자]]
[[분류:창업군주]]
▲[[분류:사생아]]
[[분류:기원전 3세기 중국 사람]]
[[분류:자유 연애]]
[[분류:
[[분류:한단시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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