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야시 곤스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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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한공사 재임 중 ===
메이지하야시 33년곤스케는 1889년 인천 주재 부영사, (1900년) 하야시영사에 곤스케는임명되었고, 주한공사에본부통상국장을 임명되었다거쳐 1899년 주한공사로 재차 부임했다. 1904년 1월 [[러일전쟁]] 중에 한국 정부에 [[한일 협정서한일협정서]] 조인에 참여하였고, 이어서 같은 해 8월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에 [[제1차 한일 협약]](1904년), 이듬해 1905년 [[제2차 한일 협약]]([[을사조약, 1905년]])이 그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 주청공사 등 ===
메이지 39년 (1906년)에는 주청공사를 맡았고 1908년에는 주[[이탈리아]] 대사를 맡았다. 다이쇼 5년 (1916년) 주중대사로 임명되었다. 1920년에는 주영대사로 임명되었고, 1921년에 스위스에서 열린 [[국제 연맹]] 총회 및 [[근동평화회의]]의 일본 대표로 참석하였다. 1925년 주영 대사에서 물러나서, 당시 영국에 체재하고 있었던 [[쇼와 천황]](히로히토)의 동생인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지치부노미야]]를 모시게 되었다. 1927년 6월, 일본으로 귀국하였고, 1934년에는 [[추밀원]]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추밀원 고문 임기 중인 80세에 사망했다.
 
==기타==
1936년 그의 업적을 기념해 남산의 통감관저 앞 뜰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광복 이후 파손된 채로 잔재로 남아 있다가 2006년 8월 3일 동상의 잔해가 발견되었다. 2015년 8월 20일, 광복 70주년을 기념하여 치욕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동상의 잔해를 모아 그의 이름을 거꾸로 새기고 설치해 두었다.<ref>[https://news.v.daum.net/v/20150820111510399 국세청 별관에 시민광장, 통감관저터엔 거꾸로 동상], 머니투데이, 2015년 8월 20일자, 김희정 기자</ref>
 
 
 
{{전거 통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