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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아들 [[고종후]] 역시 상중에 기복하여 다시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에서 싸우다가, 패하고 강물에 투신하여 자결했다. 고종후는 승정원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이때 순찰사는 전일의 혐의를 가지고 어두운 밤에 행군하다가 군사가 무너져서 죽은 것은 아니냐며 의심했지만, 후임 순찰사로 부임한 이정엄(李廷馣)이 재조사하여 그의 사망 정황을 확인하였다. [[1595년]](선조 28) 여름 왕명으로 [[정려]]되어 정문이 세워졌으며, [[1601년]]에는 문하생인 사헌부감찰 박지효와 유림 등의 명의로 사우를 지어주도록 상소를 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하고, 집안, 유림 등의 도움으로 광주에 사우를 세우고, [[1603년]]에 조정에서 포충이란 사액이 내려졌다사액만내려졌다.
 
뒤에 다시 증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고, [[1605년|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錄勳)되었다. 광주의 포충사(褒忠祠),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및 [[칠백의총|종용사]](從容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시, 글씨, 그림에 뛰어났으며, 저서에는 《제봉집 (霽峰集)》,《서석록 瑞石錄》, 《유서석록 遊瑞石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