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돈 (고려):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6번째 줄:
[[공민왕]](恭愍王) 5년([[1356년]])에 고려는 원의 지배하에 들게 된 북방의 옛 땅을 수복하고자 밀직부사(密直副使) [[유인우]](柳仁雨)를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고 대호군(大護軍) [[공천보]](貢天甫), 종부령(宗簿令) [[김원봉 (고려)|김원봉]](金元鳳)을 병마부사로 삼아 강릉도존무사(江陵道存撫使) [[이인임]](李仁任)과 함께 출정하게 하였다. 당시 쌍성총관은 조돈의 조카인 [[조소생]](趙小生)이었다.<ref name="조돈열전">《고려사》 권제111 열전제24 제신 조돈</ref>
 
고려군이 철령(鐵嶺)을 지나 쌍성과 200여 리 거리인 [[안변군|등주]](登州)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조소생은 [[밍간|천호]](千戶) [[탁도경]](卓都卿)과 함께 수비할 계책을 세우면서 한편으로 숙부인 조돈을 불러, 그가 도착하자 "숙부가 고려에서 벼슬하면서 여러 왕들로부터 총애를 받았는데, 오늘 숙부께서 남쪽 고려로 향하시면 쌍성 땅 12개 성 중에 누가 우리를 따르겠습니까?"라며 탁도경과 함께 심복 가운데 용감한 자 30명을 뽑아 조돈을 호위한다는 명목으로 그를 구금하였다. 이때 이인임은 유인우에게 조돈을 설득하면 쌍성을 평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고, 유인우가 이에 밀랍으로 글을 써서 조돈에게 보냈는데, 조돈은 그 글을 보고 기회를 엿보았지만 틈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이때 조돈은 같은 쌍성 사람으로 자신과는 어렸을 때부터 교유하였으며 당시에는 조소생의 참모로 있던 백호(百戶) 조도치(趙都赤)에게 "지금 두 녀석(조소생, 탁도경)이 조정(고려)의 명령을 거역한 것은 그대를 복심(腹心)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본래 고려 사람이고 그대의 선조는 우리 선조와 함께 모두 한양에서 왔는데, 지금 본국을 배반하고 역적 녀석을 따르다니, 도대체 무슨 마음인가? 역리(逆理)를 버리고 순리(順理)를 따르며 위험을 버리고 편안함을 취하면 공명과 부귀를 얻을 것이로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니 그대는 이 일을 도모하게."라며 설득했고, 조도적은 이에 하늘을 가리키며 "숙부가 저를 살렸습니다. 공(公)께서 먼저 하시면 제가 따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ref name="조돈열전"></ref> 이에 조돈이 기뻐하며 동생 [[조천주]](趙天柱)와 함께 앞장서서 달려 나와 삼기강(三岐江)을 건넜는데, 이때 기병 100여 명이 강가까지 추격해 왔으나 잡지 못하였다.
 
조돈은 용진에 이르러 집안사람들에게 부인(夫人)을 따라 바다를 건너 나와 등주(登州)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다음, 자신의 아들 네 사람을 데리고 하룻밤에 200리를 달려 날이 밝아올 적에 등주에 있는 유인우의 진영에 나아가, 쌍성을 지키고 있는 조소생과 탁도경은 곧 힘이 다해서 북쪽으로 달아날 것이며, 자신의 아들 조인벽을 보내어 쌍성 사람들을 회유할 것을 진언하였다. 유인우도 이에 동의하여 조인벽을 지통주사(知通州事) [[장천핵]](張天翮)과 함께 보내어 회유하게 하였는데, 쌍성 사람들은 조인벽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서로 말하기를 "조 별장(別將)이 왔으니 우리들은 다시 살았다."라고 하였으며, 잇따라 와서 고려군에 항복하였다.<ref name="조돈열전"></ref> 한편 유인우가 등주에 머무르며 열흘 동안을 지체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공민왕은 또 다른 쌍성의 천호인 [[이자춘]]에게 소부윤 관직을 내리고 고려군에 내응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이자춘도 고려군의 내응 요구에 응하여 유인우에게 병사를 보냈다. 고려군은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파괴하고, 동북면은 99년만에 고려의 영토로 회복되었다. 조소생과 탁도경은 부인과 자식을 버리고 도망가서 이판령(伊板嶺) 북쪽 입석(立石) 땅으로 들어갔다.<ref>《고려사절요》 권26 공민왕 1 공민왕 5년 7월</ref> 조돈이 개경으로 들어오자 공민왕은 그에게 예빈경(禮賓卿)을 제수하고 개경에 저택을 하사하였으며, 공민왕 6년([[1357년]])에 태복경(太僕卿)으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