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돈 (고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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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고려의 동북면병마사였던 [[조휘]](趙暉)의 손자로, 조휘가 [[고려 고종|고종]](高宗) 무오년([[1258년]]) 쌍성(雙城) 등지에서 반란을 일으켜 [[원나라|원]](元)에 내부한 뒤
[[공민왕]](恭愍王) 5년([[1356년]])에 고려는 원의 지배하에 들게 된 북방의 옛 땅을 수복하고자 밀직부사(密直副使) [[유인우]](柳仁雨)를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고 대호군(大護軍) [[공천보]](貢天甫), 종부령(宗簿令) [[김원봉 (고려)|김원봉]](金元鳳)을 병마부사로 삼아 강릉도존무사(江陵道存撫使) [[이인임]](李仁任)과 함께 출정하게 하였다. 당시 쌍성총관은 조돈의 조카인 [[조소생]](趙小生)이었다.<ref name="조돈열전">《고려사》 권제111 열전제24 제신 조돈</ref>
고려군이 철령(鐵嶺)을 지나
조돈은 용진에 이르러 집안사람들에게 부인(夫人)을 따라 바다를 건너 나와
그러나 [[단천군|단주]](端州) 이북 주민들이 항복하는 과정에서 유인우가 재물을 탐내어 살육을 자행하고, 조도치가 공민왕으로부터 호군(護軍)에 동북면천호(東北面千戶)로 임명된 것을 시기하여 죽였으며, 유인우의 휘하에 있던 장천책은 죄 없는 이를 함부로 죽이고 개인의 재산을 약탈하며 다른 사람의 처첩을 빼앗는 등의 행패를 저질러 북방 주민들이 원망하며 고려에 귀부하려던 마음을 접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 조소생과 탁도경은 쌍성이 고려에 점령된 뒤에 여진 땅에 숨었다가 형세가 궁해져 항복하고자 했지만, 조도치가 죽는 것을 보고 고려국왕의 [[옥새]](玉璽)로 자신들의 목숨을 보장한다는 문서를 받기 전에는 항복하지 않겠다고 했고, 이에 고려 조정은 공민왕 8년([[1359년]])에 조돈에게 새서를 주어 효유하였다. 조돈이 등주에서 바닷길로 반달 만에 해양(海陽)에 이르러 공민왕의 옥새가 찍혀 있는 문서를 내려주었고, 조소생 등이 조돈을 따라 입조하려고 했다가 다시 다른 마음을 품고 갑옷을 입고 기다렸으며, 조돈도 곧 배를 타고 돌아왔다.<ref name="조돈열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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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건적]](紅巾賊)이 [[서경]](西京)을 함락하자, 지병마사(知兵馬事)로써 [[안우]](安祐) 휘하에 있으면서 홍건적을 격퇴시켰다. 공민왕 9년([[1360년]])에 판사농시사(判司農寺事)에 임명되었다. 공민왕 10년([[1361년]])에 [[공부상서]](工部尙書)로 전임되어, 복주(福州, 안동)로 몽진하는 왕을 호종하였고 [[목인길]](睦仁吉)과 함께 복주의 군사를 나누어 거느리고 행궁(行宮)을 숙위하였다. 공민왕 11년([[1362년]])에 해주목사(海州牧使)로 나갔다가 어머니 상(喪)을 당하였는데, 그 이듬해에 기복(起復)하여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임명되었다가 곧이어 검교밀직부사(檢校密直副使)가 되었으며, 홍건적을 격퇴한 공으로 1등에 녹선(錄選)되었다.
공민왕 21년([[1372년]])에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간청하였고, [[우봉현]](牛峯縣)에서 살았다. [[우왕]](禑王) 원년([[1375년]])에 용성군(龍城君)에 봉해졌다. 우왕 5년([[1379년]])에 나이 들어 고향 용진(龍津)으로 돌아가고자 했는데, 막내아들 [[조인옥]](趙仁沃)이 따라가려고 하자 "우리 가문이 위태로운 시절을 만나 선조의 제사를 보전하는 것이 겨우 작은 터럭과 같았는데, 현릉(玄陵, 공민왕)의 애정을 과분하게 입어 온 집안이 보전되었으며 지위도 군(君)에 봉해지게 되었다. 너희 형제의 관직도 모두 현달하였으나 100분의 1도 보답한 것이 없었으니 너희들은 늙은 애비를 걱정하지 말고 왕실에 힘쓰는 것을 마치 내 곁에 있는 것과 같게 하여라."라며 말렸다고 한다.<ref name="조돈열전"></ref> 이듬해에 고향 용진에서 사망하였다. 나이 73세.
== 가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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