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6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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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부터 그는 오스본에 위치한 왕립해군사관학교에 사관 생도로 재학했다. 재학 시절 알버트는 다른 생도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재학 중 1911년 치룬 최종시험의 그의 성적은 하위권이었지만, 다트머스의 왕립해군사관학교로 진학하였다. [[1910년]] 5월 6일 [[에드워드 7세]]가 서거하자 알버트의 아버지은 [[조지 5세]]로 왕위를 계승하였고, 그는 형을 이어 왕위 계승 서열 2순위에 올랐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알버트는, 1916년 [[유틀란드|윌란]] 해전(1916년 5월 31일 – 6월 1일)에서 포탑 장교로서의 공을 인정 받았다.
 
[[1919년]] 10월, 알버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진학하여 1년간 [[역사]], [[경제학]], 그리고 시정학을 공부하였다. [[1920년]] 6월 4일, 알버트는 [[요크]] 공작(Duke of York), [[인버네스]] 백작(Earl of Iverness), 킬라니 남작(Baron of Killarney)의 칭호를 부여 받았다.
 
요크 [[공작 (작위)|공작]]의 지위에 오른 그는 공적인 일들을 맡게 되었다. 알버트는 아버지을 대표하여 탄광, 철도, 공장들을 방문했다. 알버트의 역할은 두터워지는 노동자층과의 유대를 형성하는 일이었다. 그의 주된 활동은 비공식적인 기구인 산업복지회 회장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공장]]들의 여러 후생조건들에 대해 자신이 제일 먼저 알기를 바란다는 명령을 내려 [[노동자]] 복지 개선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에게 '산업 공작'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하였다. 그는 자주 공장들을 돌아보았는데, 번거로움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왕실에서 방문할 때마다 깔리던 자주빛 [[카펫]]은 생략되었다. 형 [[에드워드 8세]]의 유부녀와의 스캔들 등의 미덥지 못한 행동으로 인해 앨버트에게 내려진 부담은 더 가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