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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0년]] 1월에 [[왕건]]은 병산에, 견훤은 석산에 주둔하여 대치하였다. 처음에는 견훤군의 군세가 워낙 기세등등하였기에 한창 수세에 몰려 있던 고려군은 강공훤과 홍유가 최악의 경우 고창을 사실상 포기하고 퇴각하는 것이 옳고, 이 경우 죽령은 견훤군이 점령했기 때문에 안전하게 퇴각할 수 있는 샛길을 만들어 두어야 한다고 왕건에게 진언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때 고려군의 최대의 명장인 유금필이 나서서 중국 전한(前漢.)의 조착의 발언인 '병기는 흉기요. 전투는 위태로운 일이니 죽겠다는 마음으로 살려는 계책을 생각하지 않은 연후에야 비로서 승부를 결정할 수 있다. '를 인용하면서 싸우기도 패할 걱정부터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니 진격해 고창을 구원할 것을 왕건에게 강하게 주장했고, 왕건은 이를 받아들여 고창 전투의 서막인 '저수봉 전투'에서 유금필의 활약으로 대승리를 거둔다.
 
이 '고창전투'는 고창전투의 서막인 929년 12월 '저수봉 전투'부터 시작해 930년 1월의 '고창병산전투'까지의 1개월여간의 대회전 끝에 견훤은 8천여명의 전사자를 내는 심대한 피해를 입고 이후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자신의 참모인 시랑 [[김악]]이 고려군에 포로로 잡히기에 이른다. 이 고창 전투의 승리는 그곳 유력 호족들인 김선평,권행,장길의 막판 고려군 참전의 공이 크지만 이들은 1개월여간에 계속 관망만 하고 있다, 승기가 고려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아니면 최소한 전투가 백중세인 것을 감안해 출정해 고창 전투에서 이들의 활약이 과장된 면이 크다. 그외에 고창 전투의 결정적인 승리 요인들은 [[유금필]]이 고창 전투 직전에 공훤과 홍유와는 달리 후백제군을 적극적으로 공격할 것을 왕건에게 강력하게 요청해 승락을 얻은 후 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저수봉으로 진격하여 저수봉을 빼앗은 것과 이후 여러 전투들에서 고려군들이 계속 분투하여 [[고려]]군이 대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튿날 잔병으로 견훤은 순주성(안동 풍산)<ref>이는 [[삼국사기]]의 설이다. [[고려사]]에서는 영주 순흥으로 이야기하며, 또한 [[929년]] 음력 7월에 있던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음력 9월에 [[왕건]]이 영주로 오기 위해서는 바로 옆 고을인 순흥을 견훤이 점령하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에 따라 [[삼국사기]]의 지명 및 사건 배열 순서를 따랐다. </ref>을 공격하였고, 장군 원봉이 도주하자 백성을 거두어 [[완산주]]로 퇴각하였다.
 
이 패배로 견훤은 경상도 일대에서의 패권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삼한 전체의 패권도 급속히 상실하게 된다. 경상도 일대의 호족들이 [[930년]]에 대거 [[고려]]로 돌아서게 되며, [[신라]] 또한 [[931년]]에 [[왕건]]을 [[서라벌]]로 초대하였다. 이후 견훤은 다시는 경상도 전역에 대해서 패권을 확보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