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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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북구 미아동의 조선족이 만주족에 끌려가 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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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Portrait of the Kangxi Emperor in Informal Dress Holding a Brush.jpg|서예를 연습하는 소년 헌엽|섬네일|오른쪽|200px]]
 
'''강희제'''(康熙帝, 순치(順治) 11년 [[음력 3월 18일]] ([[1654년]] [[5월 4일]]) ~ 강희(康熙) 61년 [[음력 11월 13일]] ([[1722년]] [[12월 20일]]))는 [[청 제국]]의 제4대 황제(재위 1661년 ~ 1722년)이자,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한 직후 [[청 제국]]이 [[산해관]]을 넘은 뒤 [[자금성]]에서 [[청 제국]]의 군주가 천명을 상실한 [[명나라]]의 주씨를 대신하여 중국의 새로운 수명천자(受命天子)가 되었음을 선언한 이래 두 번째두번째 황제이다. [[성씨|성]]과 [[휘]]는 '''아이신 교로 효완예이'''(玄燁,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ᠠᡳᠰᡳᠨ<br>ᡤᡳᠣᡵᠣ<br />ᡥᡳᡠ᠋ᠸᠠᠨ<br />ᠶᡝᡳ}}|Aisin Gioro Hiowan yei}}), [[묘호]]는 '''성조'''(聖祖,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ᡧᡝᠩᡯᡠ}}|Šengdzu}}), [[시호]]는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 <small>{{소리|Korean-Kangxi posthumous name.ogg|한국어 한자음으로 듣기}}, {{소리|Chinese-Kangxi Posthumous name.ogg|중국어로 듣기}} </small>)이며, 짧은 시호로는 '''인황제'''(仁皇帝,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ᡤᠣᠰᡳᠨ<br />ᡥᡡᠸᠠᠩᡩᡳ}}|Gosin Hūwangdi}})이다.<ref name="청사고6">[http://zh.wikisource.org/wiki/%E6%B8%85%E5%8F%B2%E7%A8%BF/%E5%8D%B76 청사고 본기 권6 聖祖本紀一 ]: 聖祖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功德大成仁皇帝,諱玄燁,世祖第三子也。母孝康章皇后佟佳氏,順治十一年三月戊申誕上於景仁宮。</ref> [[연호]]는 '''[[강희]]'''(康煕,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ᡝᠯᡥᡝ<br />ᡨᠠᡳ᠌ᡶᡳᠨ}}|Elhe Taifin}}, {{llang|mn|{{MongolUnicode|ᠡᠩᠬᠡ<br />ᠠᠮᠤᠭᠤᠯᠠᠩ}}|Engqe Amuγulang}})이다. 청 제국의 제3대 황제인 [[순치제]]의 셋째 아들인 그는 순치제의 후궁 출신인 [[효강장황후|효강장황후 퉁갸씨]](孝康章皇后 佟佳氏)의 소생으로서 [[자금성]](紫禁城)에서 태어난 첫 청 제국 군주이기도 하다.
 
1661년(순치 18년) 부친인 [[순치제]]가 천연두로 붕어하자,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황제로 즉위하여 1722년(강희 61년)까지 61년간 재위함으로써 [[중국]] 역사상 가장 긴 재위기간을 가진 황제이다.<ref>중국사학회(2005), 중국역사박물관 10, 34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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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은 그 해 [[2월 7일]]에 순치제의 붕어를 공식 발표하였고, 국상을 준비하였다. [[2월 17일]]에 효장태후는 순치제에게 세조(世祖)라는 묘호와 장황제(章皇帝)의 시호를 올리고 순치제의 시신을 [[:zh:清孝陵|효릉]](孝陵)에 안장하였다. 뒤이어 순치제의 유조를 낭독하니 현엽을 황태자로 책봉하라 쓰여있었다. 유조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인용문2|짐의 아들인 강비 동가씨 소생의 제3황자 현엽은 연치가 겨우 8살이나 그 용모가 단정하고 영민하니 이 나라 종묘사직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고로 현엽을 황태자에 책봉하여 다음 황제에 올리도록 하라. 27일 동안 상복을 입다가 그 뒤 옷을 대례복으로 갈아입고 즉위식을 치르도록 하라. 특히, 영시위내대신 색니, 소극살합, 알필륭, 오배는 조정의 원훈이자 개국공신으로 짐이 언제나 신뢰하던 대신들이니 충성을 다하여 신제를 보좌하고 정무를 처리하라.<ref>[http://zh.wikisource.org/wiki/%E6%B8%85%E5%8F%B2%E7%A8%BF/%E5%8D%B76 청사고 본기 권6 聖祖本紀一 ]: 朕子玄燁,佟氏妃所生也,年八歲,岐嶷穎慧,克承宗祧,茲立爲皇太子,即遵典制,持服二十七日,釋服,即皇帝位。特命內大臣索尼、蘇克薩哈、遏必隆、鰲拜爲輔臣,伊等皆勛舊重臣,朕以腹心寄託,其勉天忠盡,保翊沖主,佐理政務。</ref>}}
이에 따라 8살의 황태자 현엽을 청나라의 새 황제로 추대하니 이가 청나라의 제4대 황제인 성조 강희인황제(聖祖煕仁皇帝)이다. 어머니 강비 동가씨를 황태후에, 당시 순치제의 황후였던 효혜장황후 역시 황태후로 격상하고, 조모인 효장태후는 태황태후로 격상하였으며 이듬해인 [[1662년]]에 [[연호]]가 [[순치]](順治)에서 [[강희]](康煕)로 바뀌었다. 이 새로 정한 연호인 강희의 ‘강’(康) 자는 안녕과 평화, ‘희’(煕) 자는 조화와 흥성을 뜻하므로, 강희는 바로 평화로운 조화를 뜻한다.<ref name="염숭년">{{웹 인용| url = http://book.sina.com.cn/nzt/soc/1100164876_zhengsuoqingcaoshierdi/index.shtml| 제목 = 청나라 12명의 황제의 진짜 모습(正說淸朝十二帝)|확인날짜= 2008-09-18| 저자 = 염숭년|형식= HTML|언어= 중국어}}</ref>
 
만약 효장태후가 빨리 영시위내대신을 부르지 않고 수수방관하였다면, 황궁에 보위를 놓고 쟁탈전이 일어났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효장태후는 이를 신속히 대처하고 황태자 현엽을 제위에 올려 화를 막을 수 있었다. 황위에 오를 당시 정치적으로 매우 급변적이던 상황과 8살이라는 정치를 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린 나이가 악재로 작용하여 제왕학 수업도 제대로 받지 않은 채 즉위하였으나 자신이 평생 황제로 살아야 할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틈틈이 제왕학 수업을 지속하면서 일찍 정치를 깨닫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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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는 오배를 견제하기 위해 또 다른 보정대신인 색니의 손녀를 [[황후]]로 맞아들이기도 하였다. 그녀가 바로 강희제의 정궁황후이며 첫 번째 황후인 [[효성인황후]](孝誠仁皇后) 혁사리씨다.<ref>장유유, 허유영 역, 황제 배후의 여인, 에버리치홀딩스, 2007년, {{ISBN|89-958251-9-7}}, 348쪽</ref> [[1667년]](강희 6년) 7월 14살이 된 강희제는 조상의 예법에 따라 친정을 시작하였고 성인 의례와 함께 정식 즉위식을 치렀으나, 그 해에 자신을 보호해준 색니가 소극살합에게 강희제를 돌봐 달라는 말을 남기고 죽는다. 소극살합이 권력을 잡으려 하였으나 이에 위기감을 느낀 오배는 소극살합에게 날조된 역모죄를 뒤집어씌워 [[교수형|교수]]시키고 자신이 조정의 전권을 장악하였다.<ref name="바이하이진">바이하이진, 김문주 역, 《여왕의 시대:역사를 움직인 12명의 여왕》,미래의 창, 2008년, {{ISBN|89-5989-090-1}}, 288쪽</ref> 오배는 소극살합을 죽이는 과정에서 이에 반대하는 강희제를 강압하여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강희제는 아직 오배의 세력에 대응할 수 없어 굴복하고 말았다. 오배의 이러한 행동은 분명 군주 기만죄(기군죄)였으나 아직 힘이 약한 강희제는 그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 다른 보정대신인 알필륭은 오배의 편에 붙었으나 오배의 전횡을 부추기지도 그렇다고 비난하지도 않았다.<ref>둥예쥔, 허유영 역, 강희원전-수신제가, 시아출판사, 2004년, {{ISBN|89-8144-146-4}}, 22쪽</ref>
 
선황 순치제의 유조를 받은 고명대신 중 한 명인 소극살합을 죽이고도 계속 더 많은 횡포를 일삼는 오배를 보고 강희제는 군사를 이끌고 선수를 치려 했다. 그러나 조모인 효장태황태후가 이를 말리고 사태를 지켜보라 일렀다.<ref name="바이하이진"/><ref>장유유, 허유영 역, 황제 배후의 여인, 에버리치홀딩스, 2007년, {{ISBN|89-958251-9-7}}, 장유유, 허유영 역, 황제 배후의 여인, 에버리치홀딩스, 2007년, {{ISBN|89-958251-9-7}}, 350쪽</ref> 하루는 소극살합을 죽인 오배가 병을 핑계로 두문불출하는데 강희제가 문병을 갔다. 오배는 강희제에게 위문을 받은 뒤 다시 자리에 누우려 할 때, 그의 품 속에서 단도가 발견되었다. 강희제는 만주족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단도를 찬 것은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전통이라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으나, 분명 오배가 선수를 틈타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을 안 강희제는 치밀하게 오배를 제거하기 위한 작전을 본격적으로 세웠다.<ref name="리정">리정, 이은희 역, 제왕과 재상, 미래의 창, 2006년, {{ISBN|89-5989-049-9}}, 225-227쪽</ref>
 
강희제는 색니의 아들 [[색액도]](索額圖) 등을 규합하여 무술 수련을 한다는 명목으로 선복영이라는 이름의 친위병을 양성하였다. [[1669년]](강희 8년) 5월 16일 오배가 궁정에 알현하려 오자 강희제는 기회를 틈타 선복영을 앞세워 오배를 체포하였다.<ref>둥예쥔, 허유영 역, 강희원전-수신제가, 시아출판사, 2004년, {{ISBN|89-8144-146-4}}, 25쪽</ref> 강희제는 오배가 군주기만죄인군주 기만죄인 기군죄 등 30개의 대죄로 30번 처형되어야 마땅하지만 선황인 [[홍타이지|태종]]과 [[순치제|세조]]를 전투에서 온몸으로 막은 공을 참작하여 가산을 적몰하고 목숨만 보전하게 하고 유배형을 내렸다.<ref name="리정"/> 그러나 언제 다시 반기를 들지 모른다는 여러 대신들의 주장으로 귀양을 보내기도 전에 결국 [[사약]]을 받아 처형되었다. 강희제는 오배의 죽음으로 뒤숭숭한 조정에 색니의 차남 색액도를[[색액도]](索額圖)를 대신으로 삼아 조정을 안정시켰다. 이로써 강희제는 진정한 친정을 하게 되었으며, 신하들에게 막중한 권한을 맡기지 않고 강력한 황권을 확립하기에 이른다.<ref>둥예쥔, 허유영 역, 강희원전-수신제가, 시아출판사, 2004년, {{ISBN|89-8144-146-4}}, 28쪽</ref>
 
=== 삼번의 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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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초원은 [[홍타이지]] 이후 청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조공을 올리고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이미 [[1675년]](강희 14년) [[차하르]] 부족이 당시 삼번의 난으로 청나라에 생긴 혼란을 틈타 중원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노한 강희제는 몽골을 [[내몽골]]과 [[외몽골]]로 나누어서 부족 간의 규합을 막으려 하였다.<ref>웨난, 심규호/유소영 역, 《열하의 피서산장 1》, 일빛, 2005년, {{ISBN|89-5645-079-X}}, 27-28쪽</ref>
 
몽골이 청나라에 복속된 지 수십 년이 지나고, 몽골의 여러 부족 중 일부는 절대 복종하고 일부는 표면적으로나마 청나라에 충성을 바쳤다. 그러나 그중 몽골의 한 부족인 [[오이라트]] 부족에 뿌리를 둔 [[초로스]] 칸가 출신의 [[중가르 칸국|중가르]] 부족의 칸인 [[갈단가르단]]이 세력을 모아 몽골과 티베트를 통일하여 [[라마교|라마]] 제국을 건설할 포부를 품고 청나라에 대항할 조짐을 보였다. 이미 갈단은가르단은 [[1677년]](강희 16년) 오이라트 부족을 통합하고 [[1682년]](강희 21년)에는 [[타림 분지]]까지 점령하였다. 그런 다음 이들은 동[[투르키스탄]]을 점령하였고 이제 청나라가 다스리는 [[중원]]을 노렸다.<ref>김후, 활이 바꾼 세계사, 가람기획, 2002년, {{ISBN|89-8435-114-8}}, 327-328쪽</ref> [[준가르]]는준가르는 자신들이 군사를 일으킨 명분으로 옛 [[원나라]]의 [[대칸]]은 [[만주족|만주인]]이 아닌 [[몽골족|몽골인]]으로 옹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준가르는 청나라를 견제한 러시아와 [[티베트]]에 원조를 받기도 하였는데 심지어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5세는 갈단에게가르단에게 보슈그투 칸, 즉 대칸의 직함을 내렸다.
 
[[파일:40 years old Kangxi.jpg|섬네일|200픽셀200px|40대의 강희제]]
또한 [[1688년]](강희 27년), 준가르는 몽골 초원의 다른 부족인 [[할하]] 부족의 땅을 점령하고 거의 모든 부족민을 죽였다. 살아남은 할하족은 [[고비 사막]]을 넘어 강희제에게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였다. 준가르의 군사들이 청나라의 영토를 침략하자, [[1690년]](강희 29년) 7월 강희제는 자신의 이복형이자 순치제의 차남 유친왕 복전(裕親王 福全)과 이복동생이며 순치제의 5남 공친왕 상녕(恭親王 常寧) 등을 대동하고 친히 팔기군을 이끌고 몽골로 원정길에 올랐다.<ref>중국사학회(2005), 중국역사박물관 10, 32쪽</ref> 이것은 명나라의 [[영락제]] 이후 황제가 최초로 친히 고비 사막을 넘어 몽골 원정을 감행한 원정이며 중국 역사상 황제가 군사를 이끌고 나간 마지막 친정이었다. 강희제는 울란 부퉁에서 갈단의 군대와 마주쳤다.<ref>{{뉴스 인용 | url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7022131005 | 제목 = [공원국의 세계의 절반, 유목문명사](20)군주가 시대착오에 빠진 나라는 멸망한다, 준가르가 그랬듯이 | 뉴스 = 경향신문 | 날짜 = 2019-07-02 | 확인날짜 = 2019-09-06 | 저자 = 공원국 | 깨진링크 = 아니오 }}</ref> 이 원정에서 강희제는 할하족의 공식적인 합병 서약과 충성 서약을 받았다. 강희제는 몽골의 복속에 매우 만족하여 "옛날의 진은 돌과 흙으로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짐은 객이객에게 은혜를 배풀어 그보다 더 견고한 성을 쌓았다"고 말했다.<ref>둥예쥔, 허유영 역, 강희원전-수신제가, 시아출판사, 2004년, {{ISBN|89-8144-146-4}}, 221-222쪽</ref>
 
뒤이어 청군은 준가르군과 [[내몽골]]에서 맞붙었으나 전염병과 계속되는 패배로 사령관이었던 이복 형제들에게 책임을 묻고 군사를 물려 북경으로 환도하였다. 강희제 자신도 전염병에 걸려서 한동안 고생하였다. 그러나 [[1696년]](강희 35년)에 강희제는 8만의 팔기군 군사를 이끌고 몽골로 진입, 차오모도 전투에서 준가르군과 싸워 대승하였다. 패한 갈단은가르단은 이듬해인 [[1697년]](강희 36년)에 [[알타이 산맥]] 기슭에서 음독자살하였다.<ref name="중국사학회33">중국사학회(2005), 중국역사박물관 10, 33쪽</ref><ref>둥예쥔, 허유영 역, 강희원전-수신제가, 시아출판사, 2004년, {{ISBN|89-8144-146-4}}, 223쪽</ref>
 
강희제 치세 후기인 [[1712년]](강희 51년), 강희제는 준가르 부족을 견제하기 위해 만주남러시아에서 귀족 툴리센을 남러시아살던 [[볼가강투르쿠트]] 하류에족에 살던 [[투르구트]](Torghut)족에게 사절로사절을 보냈다.<ref>{{뉴스 인용 | url =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46 | 제목 = 140년만의 귀향…투르후트족의 기구한 사연 | 뉴스 = 아틀라스뉴스 | 날짜 = 2019-08-20 | 확인날짜 = 2019-08-22 | 저자 = 김현민 | 깨진링크 = 아니오 }}</ref> 이러한 강희제의 강한 견제에도 준가르 부족은 여전히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며, [[1717년]](강희 56년)에 준가르 부족의 신임 칸이자 갈단의가르단의 조카 [[체왕 아랍단]]은 6천 명의 적은 군사를 이끌고 과거 동맹이었던 티베트를 점령하였다. 준가르군은 수장 달라이 라마라 칭하던 티베트의 왕 [[랍장]]을 폐위시킨 뒤 살해하였고 [[1718년]](강희 57년)에 청군을 격파하였다.<ref name="중국사학회33"/>
 
준가르군은 여전히 그 세력이 막강하였으나 [[1720년]](강희 59년)에 강희제가 보낸 팔기군의 대대적인 원정에 준가르군은 결국 패퇴하였고 티베트에 원정 온 체왕 아랍단은 몽골로 돌아가 은둔하였다. 그 이듬해인 [[1721년]](강희 60년)에 청군은 [[켈장 갸초]]를 모시고 와서 제7대 달라이 라마로 만들고 티베트를 청나라의 영토에 정식 편입시켜 티베트는 안정되었다.<ref>웨난, 심규호/유소영 역, 《열하의 피서산장 1》, 일빛, 2005년, {{ISBN|89-5645-079-X}}, 156쪽</ref> 하지만, 준가르 세력은 청군의 티베트 원정 이후 결정타를 맞았으나 완전히 멸하지는 않았다. 강희제의 손자인 건륭제 때에야 [[위구르족위구르 족|위구르]]와 함께 청군에게 항복하여 그 세력이 완전히 와해되었다.<ref>조영록 외, 국학자료원, 동양의 역사와 문화, 1998년, {{ISBN|89-8206-273-4}}, 150쪽 - 건륭제는 새로세로 편입된 이 지역을 신강(新疆)으로 명명했다.</ref>
 
=== 팔기군 개편과 군사 정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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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는 전통적인 팔기군 체계에 엄격한 규율을 적용하는데 만약 장군이 병사들과 같이 돌아오지 않으면 장군을 참하고, 병졸이 자신의 부대와 같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 병졸 역시 참하도록 명하였다. 강희제는 장병이 모두 일심동체라 생각하여 책임 역시 같이 져야 한다 생각하였고 이런 엄격한 규율 덕분에 강희 시대의 팔기군은 후대인 옹정, 건륭 시대의 팔기군보다 더 훈련이 잘 되어 있고 용감하였다. 특히 강희 시대의 팔기군은 강희제의 여러 전쟁 때 큰 활약을 하며 승리를 안겨주었다.
 
후대에 가서는 팔기군의 기강이 많이 흐트러지는데, 강희 시대엔 통일을 위한 전쟁을 많이 하였으나, 후대에 들어가 전쟁이 별로 없고 군사들의 수도 갑자기 늘어나 통제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자 자연히 흐트러지게 되었던 것이다.<ref group="주">강건성세 이후 후대에 들어 [[백련교도의 난]]이 일어나자 팔기군은 이미 제기능을 상실하여 난을 제압할 수 없었다. - 이윤섭,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2009년 {{ISBN|89-7343-301-6}}, 51쪽</ref>
 
=== 문화 발전과 기독교 전례 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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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회 선교사들과의 만남 ====
강희제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신임하여 그들에게서 서양의 지리, 천문, 수학, 음악 등을 배웠고, 중국 황제 중 처음으로 [[피아노]]를 쳤으나 [[로마 가톨릭교회|가톨릭교회]]의 교리는 전혀 배우려 하지 않았다 한다.<ref group="주">현세적인 유교를 숭상한 강희제는 내세를 따지는 기독교의 교리를 좋아하지 않았다.</ref> 이러한 이유로 선교사들의 중국 선교에 위기가 닥치기도 하였다.<ref group="주">선교사들은 부유한 궁정에서 설교하는 대신, 청나라의 한족 서민들에게 선교하려 하였으나 현세적인 한족과 만주족 등은 선교에 잘 응하지 않았다.</ref> 이미 아버지 순치제 때 중국에 와서 [[흠천감]] 장관을 재직했던 [[아담 샬 폰 벨]] 신부를 시작으로 한때 러시아와의 전쟁 때 간접적으로 러시아를 돕기도 했던<ref group="주">[[선교사]]들은 같은 서양인인 러시아인들에게 청나라의 정보와 중국의 지도 등을 건네주는 간첩 역할을 맡기도 했다고 한다.</ref> 서양의 선교사 [[조아킴 부베]]·[[마테오 리파]]·[[페르디난드 페르비스트]]·[[주세페 카스텔리오네]]·[[장 바티스트 부르귀뇽 당빌|장 당빌]] 등이 계속 유럽에서 와서 새로운 학문을 강희제와 대소 신료들에게 전래하였다. 페르비스트는 아담 샬 폰 벨의 뒤를 이어 흠천감 장관을 역임하여 새로운 천문학을 중국에 전파하였고, 부베는 강희제에게 [[기하학]]을 가르쳐주었으며, 장 당빌은 정밀한 중국 지도인 《[[황여전람도]]》(皇與全覽圖)를 만들었다. 또한, 마테오 리파는 12년간 궁정에 있으면서 강희제에게 서양화를 그려 주었다. 리파는 [[1723년]]에 그의 고향 [[나폴리]]로 돌아와 나폴리 동부 대학에 ‘중국 학회’를 세웠다. 이 학회는 유럽 최초의 [[중국학]] 학회였으며, 유럽인들에게 중국과 동양을 알려주는 총본산이 되었다.<ref>에블린 S. 로스키, 제시카 로슨, 《중국, 세 명의 황제》, 왕립 예술 학회, 런던, 2005년, {{ISBN|1-903973-69-4}}.</ref> 다른 선교사들은 강희제의 통치와 학문에 대한 열정을 곁에서 지켜보고 그를 ‘[[기독교]]만 믿으면 완전무결한 군주’라고 칭하였다.
 
==== 가톨릭 허용과 금지 ====
[[파일:Clement XI.jpg|섬네일|왼쪽|180픽셀180px|[[교황 클레멘스 11세]]]]
강희제는 선교사들을 황실 [[천문대]] 등의 요직에 두는 한편 초기에는 청나라에서 [[가톨릭교회]]의 포교를 허가하였다. [[1692년]](강희 31년)에 청나라의 어느 곳에서도 선교를 허락하고 조정의 가톨릭교회에 대한 박해를 엄금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몽골 원정 때 [[말라리아]]에말라리아에서 걸렸다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강희제는 선교사들에게 더 많은 호의를 가지게 되었고, 북경 내성에 성당을 짓는 것을 허락하여 선교사들과 가톨릭교회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였다. 그러나 그 뒤로 당시 선교지역의 전통을 존중하는 [[예수회]]를 제외한 [[근본주의]] 성향 가톨릭 선교사들이 중국의 조상 [[제사]]를 [[우상숭배]]라 비판하였고, 곧 이들 선교사들의 말을 들은 [[로마 교황청]]에서 중국의 [[전례]](典禮)를 문제로 삼음으로서 중국의 전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1704년]](강희 43년)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하느님]]을 상제(上帝)나 천주(天主)로 표기하는 것이 서양에서 뜻하는 [[조물주]]라는 말과 그 뜻이 서로 다르고, 매년 봄과 가을마다 지내는 [[공자]]의 제사와 조상의 제사가 우상 숭배이므로 중국의 전례를 금지한다는 회칙을 발표하고 [[1715년]](강희 54년) 이를 재확인하였다. 강희제는 이에 대해 매우 불쾌하게 여겨 [[교황]]의 회칙을 가지고 온 특사인 교황청 소속 [[추기경]]을 체포하거나 본국으로 강제 송환하였다. 조선에서처럼 조상제사로서 효를 표현하는 유교전통을 우상숭배라 비판하면서 배척한 [[기독교 근본주의]]가 강희제의 기독교 탄압으로 이어져,[[1706년]](강희 45년) 강희제는 중국의 [[전통]]을 존중하는 [[예수회]]<ref>오세영, 《베니스의 개성상인 1,1권/오세영 지음/장원, (1993년, {{ISBN|89-5913-319-1}})</ref> 에 찬동하지 않는 선교사들을 모두 국외로 추방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특단의 상응 조치로 [[1721년]](강희 60년) 교황의 회칙 수렴을 거부하고, 교황청이 더 많은 선교사들을 파견하고 백성들에게 선교·선동해서 청나라를 가톨릭 국가로 만들려 한다며 교황의 회칙을 비판하였고, 선교사들의 청나라 출입을 허가하는 대신 선교는 불법화하였다. 그러나 강희제가 붕어하고 난 다음에 [[1724년]](옹정 2년), 강희제의 아들인 [[옹정제]]는 포교와 선교사들의 청나라 출입을 모두 불법화하고 예수회 선교사들 역시 당시 [[포르투갈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마카오|오문]](澳門, 마카오)으로 추방하였다.
 
[[1704년]](강희 43년)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하느님]]을 상제(上帝)나 천주(天主)로 표기하는 것이 서양에서 뜻하는 [[조물주]]라는 말과 그 뜻이 서로 다르고, 매년 봄과 가을마다 지내는 [[공자]]의 제사와 조상의 제사가 우상 숭배이므로 중국의 전례를 금지한다는 회칙을 발표하고 [[1715년]](강희 54년) 이를 재확인하였다. 강희제는 이에 대해 매우 불쾌하게 여겨 [[교황]]의 회칙을 가지고 온 특사인 교황청 소속 [[추기경]]을 체포하거나 본국으로 강제 송환하였다. [[1706년]](강희 45년) 강희제는 중국의 [[전통]]을 존중하는 [[예수회]]<ref>오세영, 《베니스의 개성상인 1》, 장원, 1993년, {{ISBN|89-5913-319-1}}</ref>에 찬동하지 않는 선교사들을 모두 국외로 추방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특단의 상응 조치로 [[1721년]](강희 60년) 교황의 회칙 수렴을 거부하고, 교황청이 더 많은 선교사들을 파견하고 백성들에게 선교·선동해서 청나라를 가톨릭 국가로 만들려 한다며 교황의 회칙을 비판하였고, 선교사들의 청나라 출입을 허가하는 대신 선교는 불법화하였다. 강희제가 붕어하고 난 다음에 [[1724년]](옹정 2년), 강희제의 아들인 [[옹정제]]는 포교와 선교사들의 청나라 출입을 모두 불법화하고 예수회 선교사들 역시 당시 [[포르투갈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마카오|오문]](澳門, 마카오)으로 추방하였다.
 
==== 학문존중 ====
[[파일:K'ang Hsi Dict.png|섬네일|오른쪽|200픽셀200px|광희서국 판본 《[[강희자전]]》, [[20세기]] 초]]
또한 강희제는 [[당나라]]·[[송나라]] 때의 [[과거제|과거]]의 일부분이었던 [[전시]](殿試)를 발전시킨 [[박학홍유과]](博學鴻儒科)를 실시하여, 많은 인재, 특히 강남의 한족 출신 학자들을 모아 [[박학홍유]]로 삼았고 이 중에서 뛰어난 이들은 [[한림원]] 학사로 삼았다.<ref name="신성곤">신성곤,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해문집, [[2004년]], {{ISBN|89-7483-210-0}}.</ref> 그리고 이 인재들로 하여금 명나라 시기의 실록인 《[[명사 (역사서역사책)|명사]]》(明史)를 편찬하여 초기의 [[명 태조]]와 [[명 성조]] 때 나라가 번창하였다는 점과번창하였으나 후에 여러 황제의 실정을 부각시켜서 청나라가 명나라의 정통성을 확실히 계승하였다는 것을 알리려 하였다. 또한, 박학홍유로 하여금 백과사전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연감유함]]》(淵監類函), 《[[패문운부]]》(佩文韻府), 《[[역상고성]]》, 《[[수리정온]]》, 《[[전당시]]》 등을 편찬케 하였다. 여기서 가장 돋보이는 문화적 업적은 바로 [[1711년]](강희 50년)에 시작하여 5년 뒤인 [[1716년]](강희 55년)에 완성된 《[[강희자전]]》(康熙字典)인데, 이것은 박학홍유 수십 명과 대신 [[진정경]](陳廷敬) 등이 수년 동안 공을 들여 만들었다. 4만 2천여 개의 한자가 수록된 《강희자전》의 출판은 현대 [[중국어]]의 어법과 단어를 확립시킨, 강희 시대 문화 사업의 완성이었다.
 
==== 문자의 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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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인
* 귀인 마씨 (貴人 馬氏)
* 윤귀인 (尹貴人)
* 늑귀인 (勒貴人)
* 신귀인 (新貴人, ?~1716년)
* 문귀인 (文貴人)
* 남귀인(藍貴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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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재
* 윤상재 (尹常在)
* 색상재 (色常在)
* 노상재 (路常在)
* 수상재 (壽常在)
* 상상재 (常常在)
* 서상재 (瑞常在)
* 귀상재 (貴常在)
* 상재 서씨 (常在 徐氏, ?~1702년)
* 석상재 (石常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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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응
* 영답응 (靈答應)
* 춘답응 (春答應)
* 효답응 (曉答應, ?~1767년)
* 경답응 (慶答應)
* 수답응 (秀答應)
* 치답응 (治答應)
* 묘답응 (妙答應)
* 우답응 (牛答應)
* 쌍답응 (雙答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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