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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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앞서 1919년 3월 17일 러시아 [[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고, 뒤이어 4월 23일 [[서울|경성]](서울)에서 [[한성 임시 정부]]가 수립되어,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통합문제를 제기하였다. 통합 교섭은 [[대한국민의회]]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사이에서 진행되었다. 현실적으로 국내와는 연락을 할 수 없었고 미국에 있는 [[이승만]]과도 상의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대한국민의회]]의 대표로 선정된 [[원세훈 (1887년)|원세훈]]이 [[상하이]]로 와서 교섭을 벌였다. 양쪽 모두 정부의 위치를 자기 지역에 두되 산하의 부서만 양쪽에 배치하자는 주장을 폈다. 두 주장이 팽팽히 맞섰지만 그에 못지않게 단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열망도 높았다.<ref>같은 책, 27쪽</ref> 결국 1919년 [[9월 11일]] 러시아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와 [[서울|경성]](서울)의 [[한성 임시 정부]]는 중국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통합되었다. 이로써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한국, 중국, 러시아에 흩어져 있던 여러 독립운동단체와 국내외 한국인들을 대표하는 단일한 통합 정부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 대한제국 인사들의 참여 ===
[[파일:Prince Imperial Ui.jpg|썸네일|200픽셀|오른쪽|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망명을 시도한 대한제국 [[의친왕]] 이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