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 (회음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 2600:6C5A:467F:E8F1:416F:21E2:2BB6:A365(토론)의 편집을 175.114.227.53의 마지막 판으로 되돌림
82번째 줄:
 
=== 북벌 ===
팽성 전투의 패배로 한나라와 연합한 제후들이 잇따라 연합에서 벗어났고, 당장은 배반하지 않은 서위왕 위표마저도 4월,<ref name=":0">사마천: 《사기》 권16 진초지제월표</ref> 5월<ref name="h1">반고: 《한서》 권1 상 고제기제1 상</ref> 또는 6월<ref name="s92">[[사마천]]: 《[[사기 (역사서)|사기]]》 권92 회음후열전제32 {{위키문헌언어-줄|zh|史記/卷092|사기 권92 회음후열전}}</ref>에 귀국하고서 한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한나라는 [[역이기]]를 보내 위표를 설득했으나 소용이 없어, 8월에 한신을 좌승상으로 삼고 이미 가좌승상(假左丞相)<ref name="s54">사마천: 《사기》 권54 조상국세가</ref>인 [[조참]]과, 기병대장을 맡은 [[관영 (전한)|관영]]<ref name="h1"/>과 함께 위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이때 역이기가 위나라의 대장은 백직(柏直), 기병대장은 [[풍경 (전한)|풍경]], 보병대장은 항장 이라고[[항타]]라고 전하자, 유방은 이들이 각각 한신, 관영, 조참의 상대가 되지 못하니 걱정할 게 없다고 했다.<ref name="h1"/> 한신은 혹시 주숙(周叔)이라는 인물이 대장이 되지 않았냐고 다시 역이기에게 물었으나 백직이 맞다고 하자, “더벅머리 아이 같은 놈들!”이라고 답하고 전쟁에 나섰다.
 
위표는 황하 나루를 끊고 포판에 주둔해 임진에서 한군이 건너오는 것을 막았다.<ref>포판은 하동군의 속현으로 지금의 [[융지시]]에, 임진은 내사의 직할현으로 지금의 [[다리현]]에 있으며 서로 황하를 끼고 마주보고 있다.</ref> 한신은 임진에 병사를 부풀리고 배를 늘어놓아 건널 것처럼 해놓고, 실제로는 임진보다 북쪽에 있는 하양<ref>지금의 [[한청시]]에 있다.</ref>에서 목앵부(木罌缶)를 써서 황하를 건너 안읍<ref>하동군의 속현으로 [[윈청시]] [[샤현]] 북서에 있다.</ref>을 습격했다. 위표는 놀라서 한신을 맞아 싸우러 갔고, 결국 8월<ref name=":0" /> 혹 9월에<ref name="h1"/> 위표는 한신 등에게 사로잡혔다.
 
서위를 멸한 후, 유방에게 글을 올려 북쪽과 동쪽의 나라들을 원정하기 위한 3만 명 증원을 청했다. 유방은 이를 승인하고, 옛 산상왕으로써항산왕으로써 유방에게 망명해 온<ref name=":1">사마천: 《사기》 권89 장이진여열전제29</ref> [[장이]]도 보내 함께 대나라와 조나라를 치게 했다. 당시 제나라대나라 왕은 [[진여 (사람)|진여]]였으나 조나라 왕 조헐을 돕고자 조나라에 있었기에 자기 부하 하열(夏說)을 대나라 재상으로 삼아 대나라를 지키게 했었다.<ref name=":1" /> 이에 대나라를 무찌르고 하열을 알여<ref>한서 이현주에서 인용한 맹강의 설에 따르면 알여는 [[상당군]] 습현에 있는 읍의 이름이다.</ref>에서 사로잡았는데, 유방이 형양에서 초나라를 막는 데 쓰려고 사람을 보내 정예병을 거두어갔다.
 
한신과 장이는 수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가 정형을 무찌르고 조나라를 치고자 했다. 조나라에서는 왕과 성안군 진여가 호왈 20만 대군을 정형구에 모아놨는데, 광무군 이좌거가 적은 원정군이므로 싸우지 말고 수비를 견고하게 하는 한편 자신에게 3만 명만 주어서 보급로를 끊을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진여는 이 계책을 거부했다. 한신은 간첩을 통해 이 소식을 전해듣고 기뻐하며 나아갔다. 정형구 30리 앞에서 멈추고 밤중에 경기병 2천 명을 뽑아 사람마다 붉은 기를 주어 샛길로 가 조나라 진영이 보이는 곳에 매복하게 했다. 그리고 명령했다. “조나라는 우리가 달아나는 것을 보거든 벽을 비우고 우리를 쫓으리니, 너희는 재빨리 들어가서 조나라 기치를 뽑고 한나라 기치를 세워라.” 그리고 전군에 간단하게 식사를 하게 하며 “오늘 조나라를 무찌르고 모여서 포식하자.”라고 했다. 제장들은 아연했으나 거짓으로 “예.” 했다.
96번째 줄:
전투 후 제장들이 모두 하례하고, 병법에서 산의 능선을 오른쪽에 끼고 왼쪽에 물을 끼라 한 것을 어기고 강을 등 뒤에 끼고 싸워서 이긴 것은 대체 어찌된 일인지 물었다. 답하길, 병법에서 사지에 빠진 뒤에야 살 수 있고 망지에 던져진 후에야 있을 수 있다 한 것을 따른 것으로, 아군 병사들은 전쟁에 익숙한 병사가 아니라 시정잡배들을 긁어모은 것이라서 사지에 있으니까 싸운 거지 생지에 뒀으면 달아났을 것이라 했다.
 
전투 중에 군령을 내려 이좌거를광무군을 죽이지 말고 천금을 걸어 생포할 것을 명령했다. 이좌거가광무군이 사로잡혀 오자 몸소 결박을 풀고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이좌거를광무군은 스스로 패장이라 여겨 조언할 자격이 없다 했으나 설득해 털어놓게 하니, 비록 한신이 위·대·조 삼국을 단시간에 무찌르고 성안군을 베어 위명이 드높지만 그 군대는 피곤하고 식량은 다해 가므로 연나라를 치기에는 부족하다고 지적하고 병사를 쉬게 하고 연나라는 사신을 보내 설득하자고 했다. 한신은 이를 받아들여 연나라 왕 [[장도 (연왕)|장도]]에게 사신을 보내 한나라에 종속하게 하고, 또 장이를 왕으로 삼아 조나라를 안정시킬 것을 유방에게 청했다. 유방은 이를 받아들였다.
 
[[서초 (초한)|초나라]]가 강을 건너 자주 조나라를 치자, 조나라 왕 장이<ref>사실 장이가 왕이 되는 것은 한왕 3년(기원전 203년) 11월이다.</ref>와 함께 왕래하며 조나라를 구원하고 조나라 성읍을 평정하는 한편 유방의 한나라에도 구원군을 보냈다.
103번째 줄:
 
=== 제나라 왕 ===
한왕 3년(기원전 204년) 9월, 유방이 [[역이기]]를 보내 제나라를 항복시켰다.<ref name="h1" /> 한신이 아직 평원에 이르기 전, 이 소식을 듣고 제나라 정벌을 멈추려 했다. 그러나 괴통이괴철이 이대로 가면 역이기가 투항시킨 제나라 70성이 한신이 원정하여 얻은 50성보다 더 많으니 입만 쓰는 역이기 따위보다도 못하게 되겠다며 제나라 원정을 강행하자 하니, 이를 따라 그대로 진격해 강을 건너 역하의 제나라 군대를 엄습했다. 제나라는 이미 한나라와 화친했으므로 대비를 하지 않았기에 한신의 공격에 그대로 깨져나가, 제나라 서울 임치까지 이르렀다. 역이기에 속았다고 느낀 제나라 왕 전광은 분노해 역이기를 삶고 고밀로 달아나, [[항우의 십팔제후왕|항우의 18제후왕]] 분봉 이래 자국민을 수차례 학살한 초나라와 줄곧 싸워왔음에도<ref>사마천: 《사기》 권94 전담열전제34</ref> 초나라에 구원병을 청했다. 한신은 임치를 평정하고 고밀까지 추격했다. 초나라는 [[용저]]에게 호왈 20만 군대를 보내 제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한왕 4년(기원전 203년) 10월의 일이었다.<ref name="h1" />
 
아직 초군과 제군이 합류하지 않았을 때, 용저에게 혹자가 지구전을 할 것을 청했으나 용저는 한신이 관직을 지내기 전 빨래하는 여자에게 밥이나 얻어먹고 바짓가랑이 밑으로 기어다니는 수욕을 당한 자라며 우습게 여기고는 또 싸워서 공을 세워 제나라 반을 얻자며 개전을 결심했다. 양측이 유수(濰水)를 끼고 진을 치자, 밤중에 몰래 주머니 만여 개로 모래를 넣어 상류를 막아두고 진격해 용저를 쳤다가 거짓 후퇴했다. 마침내 용저가 강을 건너 추격하자, 상류를 막아놓은 옹벽을 터 용저 군 태반이 건너지 못한 상황에서 급히 쳐 용저를 죽였다. 강 동편의 용저 군은 달아났고, 전광은 떠났다. 북으로 성양까지 추격해 전광을 사로잡았고, 초나라 군을 항복시켜 제나라를 평정했다. 한왕 4년(기원전 203년) 11월의 일이었다.<ref name="h1" />
122번째 줄:
 
=== 한나라의 중국 통일 ===
초나라에 용저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어가자 서초패왕 항우는 두려워서 우이 사람 무섭(武涉)을 보내, 한나라를 배반하고 초나라와 함께해 천하를 셋으로 나누자고 제안했다. 무섭은 항우가 한신과 예전에 알고 지냈었고, 유방은 욕심이 많고 항우와 맺은 약속을 자주 배반하여 믿을 수 없으며 항우가 망하면 그 다음 차례는 한신일 것이라 설득했다. 그러나 예전 항우의 휘하에선 극을 잡는[집극(執戟)] 낭중에 불과했고 조언도 거절되기만 한 반면 유방 휘하에서는 중용되었으니 유방을 배반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무섭이 떠나간 이후, 괴통은괴철은 한신이 천하의 저울추를 지녔음을 알고 천하를 세 솥 발같이 나누자고 설득했으나, 차마 한나라를 배반할 수 없고 자신의 공도 크니 유방이 자신의 제나라를 뺏지는 못할 것이라 여겨 거절했다.
 
유방은 형양 근처의 홍구를 기준으로 천하를 동쪽의 초나라와 서쪽의 한나라로 나누자고 항우와 약조했으나, 항우가 회군하자 장량과 진평의 조언을 받아들여 항우를 추격해 한왕 5년(기원전 202년) 10월에 양가에 머물렀다. 이때 팽월과 함께 부름을 받았으나 둘 다 오지 않아 한군은 고릉에서 초나라에 대파됐다. 유방이 장량의 조언을 받아들여 한신의 봉토를 정해주자, 그제서야 해하로 가 유방에게 합류했다. 팽월 역시 왕으로서 영토를 받고서야 마찬가지로 유방에게 합류했다.<ref name="h1" /> 12월,<ref name="h1" /> 초나라와 한나라가 결전을 벌인 해하 전투에서는 한나라 군 120만을30만을 직접 지휘해<ref>사마천: 《사기》 권8 고조본기제8</ref> 초나라를 무찔렀다.
 
=== 초나라 왕 ===
134번째 줄:
 
=== 회음후로의 폄작, 죽음 ===
항우의 장수 [[종리말]]은 집이 이려<ref>초나라 [[동해군]] 구현(현 [[롄윈강시]] 남서)에 있는 읍이다.</ref>에 있어 젊어서부터 한신과 알고 지낸 사이였다. 항우가 패망한 후 한신에게 망명했다. 한나라에서는 종리매을종리말을 체포하라는 조서를 내렸지만 한신은 이를 무시하고 종리매을종리말을 계속 숨겨준다. 그리고 한신은 자기 나라에 막 처음 와서, 현과 읍을 다닐 때 병사들을 거느리고 다녔는데, 이걸 보고 한신이 모반하려 한다고 말하는 일이 있었다. 12월, 소식을 들은 유방도 한신이 종리매 같은종리말같은 항우의 잔당들과 같이 반란을 도모할 것을 우려해 좌우에 의견을 물었는데 “조속히 병사를 내어 그 더벅머리 아이를 묻어버려야 합니다!”라며<ref name=":3">사마천: 《사기》 권56 진승상세가제26</ref> 서로 한신을 치겠다고 다투었다.<ref name="h1" /> 그러나 유방은 한신과 초나라 정병들이 한나라 장수와 병사들보다 낫다고 진평에게 말했고, 진평의 계책에 따라 운몽에서 놀려 한다는 이유로 초나라 서쪽 변경의 진현에 제후들을 불러모아<ref name=":3" /> 한신을 사로잡으려 했는데, 한신은 이를 몰랐다. 유방이 초나라에 오자, 병사를 내자니 자기는 무죄하고 황제를 알현하자니 잡힐 것 같아 두려워했다. 혹자가 종리매을종리말을 베어 가면 될 것이라고 해 종리매과종리말과 상의했는데, 종리매은종리말은 자기를 죽여 황제에게 아첨하려 하는 한신을 꾸짖고 자결했다. 한신은 종리말의 목을 가고 유방을 뵈었으나, 포박되어서 후거에 갇혀 압송되었고, 도중 낙양에서 유방에게 용서를 받아 회음후로 강등되었다.<ref>《사기·고조본기》에서는 한신을 사로잡고 10여 일 후 사면해 회음후로 삼았다고 하며, 《사기·고조공신후자연표》에서는 고제 6년(기원전 201년) 4월에 봉했다고 한다.</ref> 그리고 한신의 나라였던 초나라는 형나라와 초나라 둘로 나누어 유방의 친척 형 [[유고 (형왕)|유고]]와 유방의 동생 [[유교 (초원왕)|원왕]]에게 봉했다.<ref name="h1" />
 
이후 유방이 자기 재능을 두려워하고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병을 핑계삼아 조회에 나가지 않으면서 항상 원망하고 마음속에 불만이 가득히 지냈으며, 주발·관영 등과 동렬에 있음을 부끄러워했다. 한번은 번쾌의 초대를 만났는데 번쾌가 자신을 '신하', 한신을 '대왕'이라 일컬으며 정중히 대접했지만, 한신은 번쾌의 집에서 나오며 내가 번쾌 따위와 동렬이 되었다며 자조했다.
155번째 줄:
“폐하께서는 십만 명을 넘지 않는 규모를 지휘할 수 있습니다.”
 
고조가고제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공은 어떻소?”
163번째 줄:
“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如臣, 多多而益善耳.]<ref>《사기·회음후열전》을 따른 것으로, 《한서·한신열전》에는 而가 없고 善 대신 辦으로 나온다.</ref>
 
고조가고제가 웃으면서 말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면, 어째서 나에게 사로잡힌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