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거세 거서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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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출생 ===
신라 시조 원년, 갑자년(甲子年), 서기 전 57년
동국통감 권1 삼국기(東國通鑑 卷1 三國紀)
시대명 삼국
서기연도 BC 57년
왕대연도 신라 시조 원년
중국연호한나라 선제(宣帝) 오봉(五鳳) 원년(元年)년
여름 4월
○병진(丙辰)에 시조(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즉위하였다. 이보다 앞서 조선(朝鮮) 유민(遺民)들이 동쪽의 바닷가와 산골짜기에 나뉘어 살면서 육촌(六村)을 이루었는데, 이른바 알천양산(閼川楊山)·돌산고허(突山高墟)·자산진지(觜山珍支)·무산대수(茂山大樹)·금산가리(金山加里)·명활산고야(明活山高耶)이니, 이것이 진한(辰韓)의 육부(六部)가 되었다. 고허 촌장(高墟村長) 소벌공(蘇伐公)이 양산(楊山) 기슭 나정(蘿井)을 바라보다가 숲 사이에서 말이 울고 있으므로 가서 보고 큰 알을 얻게 되었는데, 그것을 쪼개자 어린아이가 있었다. 그를 데려다 기르매 재능(才能)이 매우 뛰어나고 숙성(夙成)하므로, 육부 사람들이 그를 특이하게 여겨 임금으로 삼았다. 나이는 13세이고 거서간(居西干)이라 불렀으며, 국호(國號)를 서라벌(徐羅伐)이라 하였다. 그가 박(朴)을 성(姓)으로 한 것은 쪼갠 알이 박[瓠]과 같았기 때문이다. 세속에서 박을 박(朴)이라고 하였다.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공자(孔子)가 시서(詩書)를 산정(刪定)할 때 당·우(唐虞)에서 끊어 시작하였으니, 대개 당·우 이전에는 세도(世道)가 홍황(鴻荒)하여 모두 믿기는 어렵기 때문이었다. 당우 이후로는 중국의 전적(典籍)에 실려 있는 것이 이미 괴이한 일이 없는데, 삼국 시조(三國始祖)의 출생이 모두 한(漢)나라와 같은 시대이거늘, 어찌 이와 같이 괴이한 일이 있단 말인가? 유독 시조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알영(閼英)과 탈해(脫解)의 출생도 또한 모두 괴이하고 정상이 아니니, 어찌 그 처음에 해우(海隅)의 땅에 살고 있는 무리가 순박하고 무지하여 간혹 하나의 괴이한 말을 만들어 내는 자가 있으면 모두 믿고 신성하게 여겨서 후세에 전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찌 그리 괴이함이 많을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신등(臣等)은 살펴보건대,]
“신라 본사(新羅本史)에 그 임금을 거서간(居西干)으로 일컬은 것이 하나였는데, 거서간은 진한(辰韓)에서 왕을 말한 것으로 혹은 귀인(貴人)을 호칭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차차웅(次次雄)이라 일컬은 것이 하나였는데, 차차웅을 혹은 자충(慈充)이라고 하였으며, 무(巫)에 대한 방언(方言)으로 대개 신성하게 여겨 경외(敬畏)하는 호칭이었습니다. 이사금(尼師今)이란 것이 하나였는데, 치리(齒理)의 호칭이었고, 마립간(麻立干)이란 것이 넷이였는데, 그 궐표(橛標)로써 지위를 표시하는 호칭이었습니다. 22대 지증왕(智證王) 3년(502)에 이르러서 비로소 왕(王)이라 일컫고, 국호(國號)를 정하여 신라(新羅)라고 하였는데, 박혁거세로부터 소지(炤知)에 이르는 21대까지는 군(君)을 일찍이 왕(王)이라 칭하지 않았고, 나라에는 정해진 호칭이 없었는데도,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연대력(年代曆)에는 모두 왕이라 칭하였고, 김부식(金富軾)이 찬(撰)한《삼국사(三國史)》에는 옛 사적(史籍)에 따라 그대로 기록하였으며, 권근(權近)이 지은 《사략(史略)》에는 최치원의 연대력을 따라 모두 왕으로 기록하였으니, 이것은 아마도 변경시켜서 명호(名號)를 높이려고 한 것입니다. 이제 신등도 또한 최치원과 권근의 예에 의하여 시조(始祖) 이하를 모두 왕으로 칭하고, 국호는 신라를 가장 앞에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혁거세 21년(서기 전 37)에 고구려 시조 주몽(朱蒙)이 즉위하였고, 40년(서기 전 18)에 백제 시조 온조(溫祚)가 즉위하였으니, 삼국이 나라를 세운 것은 세월이 비록 선후의 차이가 있지만, 모두 혁거세 때에 이미 솥발처럼 형세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이름을 삼국기(三國紀)라고 한 것입니다.”
신라 시조 5년, 무진년(戊辰年), 서기 전 53년
동국통감 권1 삼국기(東國通鑑 卷1 三國紀)
시대명 삼국
서기연도 BC 53년
왕대연도 신라 시조 5년
중국연호 한나라 선제 감로(甘露) 원년(元年)년
봄 정월
○알영(閼英)을 비(妃)로 삼았다. 처음에 용(龍)이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나 그의 오른쪽 갈빗대에서 여아(女兒)를 낳았는데, 어떤 노파가 이를 이상히 여기어 그를 기르고 우물의 명칭(알영)으로써 이름을 삼았다. 성장하여서는 덕성스러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시조가 받아들여 비로 삼았다. 어진 행실이 있고 내조를 잘하였는데, 그 당시 사람들이 이성(二聖)이라고 일컬었다.
[권근이 말하기를,]
“국가가 흥성(興盛)하는 데에는 내조(內助)를 잘함에 있지 않음이 없었다. 하(夏)나라에는 도산씨(塗山氏)가 있었고, 상(商)나라에는 유신씨(有imagefont氏)가 있었으며, 주(周)나라에는 태사(太姒)가 있었으니, 부부의 도리를 바르게 하여 교화의 기반을 잡게 한 것이 지극하였다. 알영(閼英)이 시조(始祖)의 비(妃)가 되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찬미하였으니, 반드시 그 덕이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감복시킴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시조와 아울러 일컬어 이성(二聖)이라고 한 것에 이르러서는 잘못이다. 이성이란 칭호가 당(唐)나라 고종(高宗) 무후(武后) 때에 보이는데, 고종이 무후에게 빠져 그를 세워 황후로 삼자, 무후가 교묘한 지혜와 음흉하고 사나움으로 대정(大政)에 간여하여 수렴(垂簾)하고 함께 청정(聽政)하면서 결단하니, 그때 사람들이 ‘이성’이라 했던 것이다. 신라 시대의 초창기에는 백성의 풍속이 순박하여 그 임금의 칭호에도 오히려 방언(方言)을 사용하였으므로 응당 갑자기 이성이라 칭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이는 반드시 신라 사람들이 당나라 고종을 섬긴 이후로 ‘이성’이란 칭호를 익히 듣고서, 그 그릇됨을 알지 못하고 흠모해 본받아서 추칭(追稱)한 것일 것이다. 더구나 당나라에서 내린 제서(制書)에는 성덕왕(聖德王)을 칭하여 ‘이명(二明, 시조와 시조의 비(妃). 즉 두 성인)이 경조(慶祚)가 된다.’고 하였으니, 신라 사람들이 당나라에 들어가서는 감히 ‘이성’이라 칭하지는 못하였으며, ‘이명’이라고 하였을 것인데, 그 나라 안에서만 스스로 칭하기를 이렇게 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신등은 살펴보건대,]
“권근이 이르기를, ‘이성(二聖)의 칭호가 당나라 고종 무후 때에 보이는데, 신라 사람들이 당나라를 섬기면서 흠모하여 추칭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상고하건대, 한(漢)나라 성제(成帝) 홍가(鴻嘉) 원년(元年; 서기 전 20)에 신라의 호공(瓠公)이 마한(馬韓)에 빙문(聘問)하면서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이성(二聖)이 처음 일어나게 됨으로부터 인사(人事)가 닦아지고 천시(天時)가 순조로워졌다.’ 하였고, 한나라 평제(平帝) 원시(元始) 4년(4)에 신라왕 남해(南解)가 좌우에게 이르기를, ‘이성이 나라를 버리고 떠나셨으므로 부덕한 내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고 하였으니, 이성의 칭호는 당시에 이미 있었습니다. 그런데 권근의 논변이 이와 같은 것은 어찌된 것입니까?”
신라 시조 8년, 신미년(辛未年), 서기 전 50년
동국통감 권1 삼국기(東國通鑑 卷1 三國紀)
시대명 삼국
서기연도 BC 50년
왕대연도 신라 시조 8년
중국연호 한나라 선제 감로 4년
○왜(倭)가 와서 변경을 침범하여 노략질하려다가 왕이 신덕(神德)이 있다는 말을 듣고 곧 돌아갔다.
신라 시조 17년, 경진년(庚辰年), 서기 전 41년
동국통감 권1 삼국기(東國通鑑 卷1 三國紀)
시대명 삼국
서기연도 BC 41년
왕대연도 신라 시조 17년
중국연호 한나라 원제(元帝) 영광(永光) 3년
○왕이 6부(六部)를 순행(巡幸)하여 안무(按撫)하고, 농업과 잠업(蠶業)을 권장하며 독려하였는데, 비(妃) 알영(閼英)도 따라갔다.
[권근이 말하기를,]
“지방을 살펴보는 것은 임금의 일이다. 옛날에 임금이 봄에는 경작(耕作)하는 것을 살펴보고 모자란 것을 보충해 주며, 가을에는 추수하는 것을 살펴보아 넉넉하지 못한 것을 도와주었다. 그러므로 (왕이) 한번 놀고 한번 즐기는 것이 모두 백성을 위하는 일이 아님이 없었다. 이제 시조(始祖)가 6부를 순행하여 안무하고, 농업과 잠업을 권장하며 독려하는 것은 옛날에 지방을 살펴보아 부족한 것을 보조해 주던 법에 가깝다. 부인(婦人)에 있어서는 바깥일을 보는 법이 없으므로 교령(敎令)이 규문 밖을 나가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도 비가 따라갔으니, 이는 예(禮)가 아니다.” 하였다.
신라 시조 19년, 임오년(壬午年), 서기 전 39년
한나라 원제 영광 5년
봄 정월
○변한(卞韓)이 그 나라를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이름의 뜻===
[[양주동 (1903년)|양주동]]의 연구에 의하면, ‘朴赫居世’의 ‘赫’과 ‘朴’은 둘다 ‘ᄇᆞᆰ’(밝다)의 뜻을 반복하여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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