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담 (삼국지):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편집 요약 없음
잔글편집 요약 없음
1번째 줄:
'''고담'''(顧譚, ? ~ ?)은 [[중국]] [[삼국 시대 (중국)|삼국 시대]] [[오나라]]의 [[정치가]]로관료로, [[자 (이름)|자]]는 자묵(子默)이며 [[양주 (안후이 성)|양주]](揚州) [[오군]] 오현(吳縣) [[사람]]이다. 승상 [[고옹]]의 손자로, 고옹 사후 태상·평상서사를 지냈으나 이궁의 변에 연루돼 몰락했다.
 
== 생애 ==
약관의 나이에 [[제갈각]](諸葛恪) · [[장휴]](張休) · [[진표 (삼국지)|진표]](陳表)와 함께 선태자 [[손등]](孫登)의 사우가 되었다. 중서자, 보정도위로 전임되었다.
 
[[적오]] 연간, [[제갈각]]의 뒤를 이어 좌절도로 전임되었다. 고담은 장부를 살필 때에 주산을 쓰지 않고, 손가락을손가락과 굽혀 마음 속으로 셈하여암산으로 의심스럽거나 잘못된 부분을 모두 찾아냈다.찾아내 수하의이로써 관리들은 이 때문에 고담에게수하들을 복종하였다복종시켰다. 봉거도위가 더해졌다. [[설종]](薛綜)이 선조상서로 임명되자, 고담에게 사양하였으나사양했으나, [[설종]]은 적오 5년([[242년]])에 선조상서를 겸임한 채로 태자소부가 되었고,되었다. 이듬고담은 해에[[설종]]이 죽었으며,죽은 후에 고담이그를 대신했다. 선조상서를 지내며 [[설종손권]] 대신하게신임을 되었다받고 있었으나, 손권의 조카딸이 고옹의 조카에게 시집가 손권이 고옹 일족을 불러 연회를 열었을 때 일어나 그칠 줄 모르고 세 번 춤을 췄는데 고옹은 이를 교만한 태도로 보아 속으로 분노하고 다음날 고담을 집안을 망칠 자라고 꾸짖었다.
 
[[고옹]]이고옹이 [[243년]]에 죽자, 고담은 태상이 되었으며, [[고옹]]을고옹을 대신하여 평상서사가 되었다. 이때 노왕(魯王) [[손패]](孫覇)가 사랑을 받아 태자 [[손화]](孫和)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 고담은받자, 상소를 올려 적자와 서자의 절도를 분명히 할 것을 말했으므로, [[손패]]와 사이가 벌어졌다. 또, 위위장군 [[전종]](全琮)의 아들로 [[손패]]의 도당인 전기(全寄)가전기가 편협하고 간사하였으므로 고담은 용납하지 않았다. 고담의 아우 [[고승 (삼국지)|고승]]과 [[장휴]](張休)는 북쪽으로 수춘을 정벌하러 갔고, [[전종]]이 대도독으로서 위의 [[왕릉 (조위)|왕릉]](王淩)과 싸웠다. 오군의 형세가 불리하여 장군 진황의 군대가 괴멸되었는데, 고승과 장휴는 분투하여 위나라의 공세를 막아냈고, 위군의 공격이 멈추자 전기의 아버지 [[전종]] 일족의 아들 [[전서 (동오)|전서]](全緖)·[[전단 (全端동오)|전단]]이 진격하여 [[왕릉 (조위)|왕릉]]은 퇴각했다. 논공행상 때 적을 막은 [[고승 (삼국지)|고승]]과 [[장휴]]의 공을 적을 물러나게 한 [[전서 (동오)|전서]]와 전단의 공보다 크게 평가하여 [[고승 (삼국지)|고승]]과 [[장휴]]는 잡호장군, [[전서 (동오)|전서]]와 전단은 비장군에 임명했다. 이로써 전기전종 부자는일족은 더더욱고담과 원망을원한을 품고더욱 쌓아, 고담을 해할 계책을 짰다.참소했고, 마침내 고담은 교주(交州)로 유배당했다. 유배당할 때 사사로이 재산을 모은 것이 없었으며, 노비는 열 명이 채 되지 않았다.<ref>저자 미상, 《고담별전(顧譚別傳)》[<nowiki>[</nowiki>[[이방 (송)|이방]](李昉), 《[[태평어람]](太平御覽)》 권500에 인용]</ref>
고담이 선조상서로, 귀중한 신임을 받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손권]](孫權)의 조카딸이 [[고옹]](顧雍)의 조카에게 시집가, [[고옹]] 부자와 손자 고담을 청했는데, [[손권]]은 매우 즐거워했다. 고담은 일어나 세 번 춤을 춰 그칠 줄을 몰랐는데, [[고옹]]은 속으로 분노했다. 다음날, [[고옹]]은 고담을 불러, 신하는 공손하고 삼가는 것을 절의로 삼고, 고담은 가문에 힘입어 총애와 은혜를 입었을 뿐인데, 춤추면서 그칠 줄을 몰랐으니, 겸허해도 부족할 것이며, 장차 집안을 망칠 자라며 꾸짖었다.
 
[[고옹]]이 [[243년]]에 죽자, 고담은 태상이 되었으며, [[고옹]]을 대신하여 평상서사가 되었다. 이때 노왕(魯王) [[손패]](孫覇)가 사랑을 받아 태자 [[손화]](孫和)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 고담은 상소를 올려 적자와 서자의 절도를 분명히 할 것을 말했으므로, [[손패]]와 사이가 벌어졌다. 또, 위위장군 [[전종]](全琮)의 아들로 [[손패]]의 도당인 전기(全寄)가 편협하고 간사하였으므로 고담은 용납하지 않았다. 고담의 아우 [[고승 (삼국지)|고승]]과 [[장휴]](張休)는 북쪽으로 수춘을 정벌하러 갔고, [[전종]]이 대도독으로서 위의 [[왕릉 (조위)|왕릉]](王淩)과 싸웠다. 오군의 형세가 불리하여 장군 진황의 군대가 괴멸되었는데, 고승과 장휴는 분투하여 위나라의 공세를 막아냈고, 위군의 공격이 멈추자 전기의 아버지 [[전종]] 일족의 아들 [[전서 (동오)|전서]](全緖)·전단(全端)이 진격하여 [[왕릉 (조위)|왕릉]]은 퇴각했다. 논공행상 때 적을 막은 [[고승 (삼국지)|고승]]과 [[장휴]]의 공을 적을 물러나게 한 [[전서 (동오)|전서]]와 전단의 공보다 크게 평가하여 [[고승 (삼국지)|고승]]과 [[장휴]]는 잡호장군, [[전서 (동오)|전서]]와 전단은 비장군에 임명했다. 이로써 전기 부자는 더더욱 원망을 품고, 고담을 해할 계책을 짰다. 마침내 고담은 교주(交州)로 유배당했다. 유배당할 때 사사로이 재산을 모은 것이 없었으며, 노비는 열 명이 채 되지 않았다.<ref>저자 미상, 《고담별전(顧譚別傳)》<nowiki>[</nowiki>[[이방 (송)|이방]](李昉), 《[[태평어람]](太平御覽)》 권500에 인용]</ref>
 
유배지에서는 조용히 살면서 《신서》20편을 지었다. 그 중 〈지난편〉은 자신의 처지를 슬퍼한 것이다. 유배된 지 2년 만에 42세로 교지(交趾)에서 죽었다.
줄 29 ⟶ 27:
{{전임후임
|직책=[[오 (삼국)|동오]]의 [[태상 (관직)|태상]]
|임기=[[243년]] ~ [[244년]]
|전임자=[[반준]]
|후임자=[[부상 (동오)|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