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태그: m 모바일 웹
194번째 줄:
== 비판과 평가 ==
=== 비판 ===
세계적으로 최악의 지도자 1~2위를 늘 다투는 인물이었다.[http://news.donga.com/3/all/20060123/8268662/1] 자신의 독제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대내적으로는 정치범 수용소와 자유와 끔찍한 인권을 탄압을 자행했다. 현대판 봉건주의 나라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최고지도자인 김일성의 후계자 김정일이 대리청정체계로 들어서면서 극단적인 테러리즘이 생겨났다. 대표적으로 아웅산 폭파 사건과 최은희 등의 납북과 [[KAL기 폭파사건]]을 배후 조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9020300209215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9-02-03&officeId=00020&pageNo=15&printNo=20722&publishType=00020</ref><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022100209131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6-02-21&officeId=00020&pageNo=31&printNo=23117&publishType=00010</ref> 북한이 이런 테러의 배후로 밝혀지면서 우방국들마저 외교관계를 기피하기 시작해 외교무대에서는 입지가 좁아졌다. 이후 미국에 의해 테레지원국으로 정해져 적선국 제재를 받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시간이 흘러 냉전이 종식된 후 미국을 중심으로한 새로운 경제질서에서 완전히 소외가 되는 최악의 결과를 맞게 된다. 사회주회 경제체계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던 1980년대 농업생산력 저하로 고생하는 사회주의 나라들이 인센티브제도를 도입해 생상성 향상을 이뤘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체제보장에 해가 될까 두려워 오히려 협동농장을 유지함으로써 농업생산력은 더욱 떨어졌다. 1995년과 1996년 대홍수를 통해 수 많은 아사자가 나왔지만 특별한 자연재해가 없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모자라는 식량은 50만톤 이상이기 때문에 아사자는 자연스러운 사회현상이 됐다. 김정일의 전속 요리사였던 후지모토겐지의 증언에 따르면 고난의 행군시절에도 호화로운 생활을 유지했다. 1995년 국제사회에 식량원조를 요청하면서 부각된 식량난<ref>{{웹 인용 |url=http://nk.chosun.com/unification/kid.html?ACT=life_detail&id=46&category=9# |제목=조선일보 북한 정보, 북한의 식량난 |확인날짜=2007-07-11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41221124309/http://nk.chosun.com/unification/kid.html?ACT=life_detail&id=46&category=9# |보존날짜=2004-12-21 |깨진링크=예 }}</ref> 을 통해 대외적으로 선전해오던 사실은 거짓이었다는 사실이 들어났다.. 세계적으로 볼 때 독재자라고 하더라도 대체로 자국 국민의 삶의 향상을 위해 노력했던 근거가 보이지만 그는 그런 노력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핵개발을 함으로써 국제적인 경제제재를 받는 것인데 자국민의 삶과 나라 경제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핵개발을 통해 얻는 건 대외적으로 독제체재를 유지를 위한 협상카드이다.
 
또한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과의 상봉을 지키지 않았고, 2002년에 [[핵 확산 금지 조약]]의 탈퇴 선언,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압력에 의한 [[신의주 경제 특구 계획]] 실패, 실제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식량난은 1992년 이후 식량절약을 위해 '하루 두끼 먹기 운동'을 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다. 더군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