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사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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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신민주주의론은 인구의 대다수가 농민인 것과 동시에, 반공주의적 정서가 강했던 당시 중국 현실을 반영한 특수한 형태의 단계론인 것이다. [[마오쩌둥]]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에도 해당 시점의 단계를 신민주주의 단계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그는 당시 중국 내 정파였던 민주연맹과 같은 자유주의자들과도 연합한다. 그리고 [[1958년]]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생산력을 산출하기 위한 [[대약진운동]]이 시작됐는데, 이도 역시 신민주주의론에 기초하여 시작된, 자주적인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생산력 증강 정책이기도 하였다. 국유화, 국가 주도의 산업 자본 투자, 외세의 개입 차단, 민족자본가들과의 통일전선 등을 통한 자력 발전 요소는 [[종속 이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 반수정주의 ====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 이후 소련은 노골적으로 자본주의국가와의 타협을 시도했으며, 과거 이오시프 스탈린의 이론적 경향성에 대해서 청산주의 입장을 보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중소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마오쩌둥]]은 소련이흐루쇼프가 [[사회제국주의]](社會帝國主義) 정책을 취하고 있으며, 당을 수정주의로 지도하여 혁명의 퇴조를 가져온다고 비판하였다.<ref>{{cite journal |last1=Scalapino |first1=Robert A. |year=1964 |title=Sino-Soviet Competition in Africa |journal=Foreign Affairs |volume=42 |issue=4|pages=640–654 |jstor=20029719|doi=10.2307/20029719 }}</ref> 그리고 그는 동유럽 지역에서 소련의 수정주의를 격렬하게 비판하던 알바니아의 [[엔베르 호자]]({{llang|sq|Enver Hoxha}})와 협력하게 된다. 엔베르 호자는 스탈린 정식을 따르는 철저한 스탈린주의자로, 소련의 수정주의를 비판하는 마오쩌둥의 사상을 받아들였고, 그 결과 교류가 오가면서 마오쩌둥 사상은 '아시아의 반수정주의'로 거듭나게 되었다.<ref>{{Cite journal|last=Marku|first=Ylber|date=2019-05-30|title=Communist Relations in Crisis: The End of Soviet-Albanian Relations, and the Sino-Soviet Split, 1960–1961|url=https://doi.org/10.1080/07075332.2019.1620825|journal=The International History Review|volume=0|issue=0|pages=1–20|doi=10.1080/07075332.2019.1620825|issn=0707-5332}}</ref>
 
마오쩌둥 사상에서 드러나는 반수정주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