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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한 ==
건무 15년(39년)에 하남윤으로 개칭했다. 하남윤은 서울인 낙양을 관할했으며 다른 태수들보다 한 급 높은 중이천석에 해당했다.<ref>사마표: 《속한서》 지제27 백관4 {{위키문헌언어-줄|zh|後漢書/卷117|후한서 권117}}</ref> 영화 5년(140년) 기준으로 28만 486호, 110만 827명이 있었다. [[사예교위|사예교위부]]에 속했다. 현의 순서는 《속한서》 군국지를 따르며, 첫 현이 태수의 치소다. [[190년]]([[초평]] 원년) [[십상시의 난]]을 진압한 뒤 정권을 잡은 [[동탁]]이 [[낙양]]성을 불태우고 군역의 상당수가 군벌 전쟁의 주요 전장이 되면서 크게 황폐화되었다. [[196년]]([[건안]] 원년)[[헌제 탈출전]]을 성사시켜 헌제를 비롯한 황실과 중앙 관료들을 장안에서 탈출시킨 [[조조]]가 황폐화된 낙양을 대신하여 [[영천군 (중국)|영천군]]의 [[허창]]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220년]] [[조비]]가 낙양으로 수도를 옮길때까지 완전히 버려졌다. [[213년]](건안 18년), [[조조]]가 위공에 오르면서 전국을 13주에서 9주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사예교위부가 없어져 [[예주|예주자사부]] 관할로 들어갔으며, [[형양군 (서진)|형양도위]]가 떨어져나왔다.<ref>《속한서》 지제28 백관5에 인용된 《헌제기거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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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진 ==
[[220년]] [[12월 10일]],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조위|위나라]]를 세우게 된 [[조비]]가 낙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재건되었다. [[영천군 (중국)|영천군]]으로부터 양적현(陽翟縣)이, [[홍농군]]으로부터 육혼현(陸渾縣)이 본윤으로 이관되었다. 서진 건국이후 [[266년]]([[태시 (서진)|태시]] 2년) 하남윤 동부지역의 옛 형양도위 지역이 [[형양군 (서진)|형양군]]으로 분리신설되면서 군역이 축소되었다. [[영가의 난]]시기 [[전조 (오호 십육국)|한나라]]의 황제 [[유연 (전조)|유연]]이 보낸 [[유총]]의 군대, [[석륵]], [[왕미]]의 공격을 받으면서 식인이 행해지는 등 황폐해지기 시작했고 결국 [[311년]] 4월, 유총이 낙양을 함락시키면서 전조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11현 114,400호를 거느렸다.<ref>《진서》14권 지 제4 지리上 사주 하남윤 [https://zh.wikisource.org/wiki/%E6%99%89%E6%9B%B8/%E5%8D%B7014]</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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