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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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노자의 道는 無이다. 무를 단순히 有가 아닌 것으로 정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유이므로 무는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렇다면 노자는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무를 알았단알았는궁금핮이 말인가?않을 도덕경은수알없다는 聖人이 무를 알아가는 과정을 기술한다. 도덕경의 성인은 노자를 필두로 무를 알아가는 여정에 오른 사람들을 가리킨다.
 
 
무를 알아가는 과정을 무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1장 玄之又玄이란 표현으로 요약된다. 무는 유가 아니므로 ‘어두운 것’으로 나타나며 무의 운동은 무에 동화되어 무를 닮는 효과를 낳는다. 무의 운동은 無知無欲과 無爲로 이루어진다. 無知는 무를 지향하는 활동이며 無欲은 무로부터 끊임없이 현의 깨달음을 얻는 사건이며(玄之又玄) 無爲는 그 깨달음이 愛民治國으로 발휘되는 사건이다.
 
 
무를 알아가는 과정을 무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1장 玄之又玄이란 표현으로 요약된다. 무는 유가 아니므로 ‘어두운 것’으로 나타나며 무의 운동은 무에 동화되어 무를 닮는 효과를 낳는다. 무의 운동은 無知無欲과 無爲로 이루어진다. 無知는 무를 지향하는 활동이며, 無欲은 무로부터 끊임없이 현의 깨달음을 얻는 사건이며(玄之又玄), 無爲는 그 깨달음이 愛民治國으로 발휘되는 사건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경험과 이성과 의지를 동원하여 유를 아데, 이때 의지는 경험과 이성을 이끄는 주체의 방향성이다. 그런데 경험과 이성으로는 무를 알 수 없다. 이 때문에 성인은 무를 알기 위해 오히려 경험과 이성을 부정(否定)하고 그 결과 의지까지도 부정한다. 이때 성인은 단순한 ‘나’로 머물면서 무 안에 잠기게 된다. 성인은 의지를 부정함으로써 무를 지향하는 의지를 얻고 이로써 무를 안다. 여기에서 無知라는 명칭이 유래한다. 여기에서 매우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다. 성인은 무로부터 뜻밖에도 얻어 욕구(欲)로부터 초연한 새로운 자아를 깨닫는다. (1장 常無欲以觀其妙) 노자는 자신에게 無欲의 깨달음을 주는 알 수 없는 ‘그’ 존재에 道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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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의 실천하는 일(行)’은 무지무욕과 무위로 이루어진다. 무지무욕을 도의 뿌리라면 무위는 도의 줄기와 가지라고 할 수 있다. (69장 深根固柢長生久視之道) 무지무욕이 없이는 결코 무위를 실천할 수 없다. 성인은 무지무욕의 內的 운동을 우선한다. 무위자연의 外的 활동은 내적 운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무지무욕을 거들떠보지 않고 무위자연을 찬미하지만 모두 공염불에 불과하다.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는 경험과 이성에 기초한다. 그런데 무의 운동은 경험과 이성을 초월하므로 일상적인 언어로 표현하기가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노자는 부득이하게 비유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도덕경은 대부분 비유로 이루어져 있다. 도덕경이 어렵게 느껴지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무의 운동은 매우 쉽고 단순하며(70장 吾言甚易知 甚易行) 무의 운동을 통하여 모든 비유가 저절로 그 의미를 드러낸다.
 
 
 
지금 말하는 비유(parable)는 직유(simile), 은유(metaphore), 상징(symbolism), 유추(analogy), 우화(allegory) 등을 모두 포함한다. 비유를 풀어내려면 반드시 도를 실천해야만 한다. 따라서 도를 실천하지 않고 도덕경을 해석하기는 불가능하다. 도덕겨을는 학자들은많은를 실천하는 대신에 도를 지식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 때문에 그들이 내놓은 도덕경 해설서들 중 그 어떤 것도 도덕경 전체를 모두 포괄하지 못하며 그나마 내용의 앞뒤가 맞지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