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가짜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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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 김일성 김성주설과 남북 관계 ===
김일성 김성주설은 오랫동안 [[대한민국]]에서 반공교육을 통해서 거의 확실한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여러 정황과 증거로 봤을 때 김성주와 김일성은 동일인물로 추정된다. 하지만 냉전시대 남북간의 체제 경쟁에서 김일성의 항일 무장 투쟁 경력을 부담스러워한 우익세력이 김일성의 경력을 깎아내리려고 유포시켰다는 주장이 있었고 이는 1998년 남한 최초로 이루어진 여·야 정권교체 후부터 더욱 활발히 이루어졌다. 해방 정국 당시의 역사 기록을 보면, 남한 정부 수립 이전에도 이미 다수가 '''가짜 김일성설'''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쉽게 증명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북조선의 김성주가 김일성이란 이름으로 활동하였다는 점은 남북 학자들은 다수라도,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 수립 이후 만주 지역 조사와 타도제국주의동맹에서 활동했던 김일성의 동료들의 증언 등, 여러가지 평가를 미루어 볼 때, 김일성이 가짜 독립운동가라는 주장은 사실상 근거가 없는, 낭설이라고 평가하는 의견도 있다.<ref>신주백, 『김일성은'가짜'가 아니다』(1991년, 역사비평 15) 참조</ref>
 
=== 김성주의 개명(改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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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1937년의 [[보천보 습격|보천보 사건]] 때부터라고 주장하면서 북한 김일성이 그 사건의 당사자가 맞으므로 진짜가 맞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상당수 있다. 그러나 해방 당시 [[보천보 습격|보천보 사건]] 자체나, 그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이 1937년 11월 전사했다고 다수 언론에 보도된 것을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ref name="news"/> 물론, 이 보도 하나로 토벌을 진행하던 만주국군 토벌대가 실제로 김일성을 사살했는지는 정확히 알 순 없다. 그 당시 만주국 치안대는 항일 격전지에서 공비의 수괴가 토벌됐다고 선전하는 식의 공작 활동을 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ref>윤휘탁, 『1930년대 만주항일유격대와 농민 : 공산유격대를 중심으로』 pp. 58 ~ 60 (1993년, 중국학논총)</ref>
 
동아일보 취재단이 1998년 10월26일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선물로 준 ‘보천보 전투 금 인쇄 원판’이 사실로 확인됐다.<ref>{{저널 인용
|url=http://www.journalist.or.kr/news/article.html?no=16207
|제목=동아일보, 김정일에게 ‘보천보전투 금인쇄원판’ 선물
|출판사 =기자협회보
|날짜=2007.12.04}}</ref>
 
보천보 전투는 1937년 김일성 전주석이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일본군과 싸운 것으로 북측에서는 “조국 땅에서 울린 첫 총성”이라며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국내에서는 김 전주석이 항일운동을 했느냐의 여부로 논란이 있지만, 동아일보는 보천보전투 소식을 다룬 자사의 신문기사를 금 1.2킬로그램을 들여 원판으로 제작해 선물로 바친 것이다. 보천보전투가 규모가 큰 게 아니었지만 당시 동아일보가 보천보전투를 다룬 호외를 2번이나 발행하면서 김일성이 전국적으로 유명인사가 됐다. 일제 탄압이 극심하던 당시 만주에 근거지를 둔 빨치산 부대의 첫 국내 진공작전이었으니 그만큼 조선민들의 마음에 크게 다가왔고 일제에 충격을 준 화제가 된 전투였던 것이다. 그 시점에 우파 민족주의 진영은 유명인사들이 상당수 친일로 변절하던 시기였다.
 
반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의 이름은 1919년 3.1운동 무렵에도 퍼져 있었다는 증언이 있고, 적어도 1920년대 초에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ref name="leem">이명영(李命英, 1928-2000), "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21 第一章 옛「김일성 장군」의 傳說과 正體</ref> 평양의 집회에 모였던 사람들이 눈앞의 김성주가 보천보 사건의 주역 김일성이 아니라고 가짜라 한 것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익히 이름을 들어왔던 반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으로 보기에는 나이가 맞지 않았기 때문에 가짜라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