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사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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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이 젊은 시절부터 밀접하게 지낸 [[농촌]]사회의 관찰로부터 도출된 [[중국]] 발전을 위한 모든 이상을 포함하고 있다. 그 내용은 대공무사(개인의 이익보다 공공의 복지를 우선한다), 대중노선(농촌대중의 의견에 정치적 지침을 요구하여, 그것을 이해시켜 모두 행동한다), 실사구시(현실로부터 배우고, 이론을 세운다) 등을 들 수 있다. 이 외에도 [[사회]]와 협조할 수 있는 [[개인주의]], 성인의 협력, 농촌으로부터 봉기하고 [[도시]]를 둘러싸 전술이론, [[세계]] 각국이 각자의 특성에 맞는 공산혁명을 실시하는 것으로, 제3차 세계대전을 막을 수 있다고 하는 〈중간지대론〉 등도 '모택동사상'에 포함할 수 있다.
 
== 모순론군사 이론 ==
=== 지구전 ===
『지구전론』은 [[마오쩌둥]]이 [[옌안]]에서 [[1938년]] [[5월 26일]] ~ [[1938년]] [[6월 3일]]까지 논의한 『항일전쟁전략』(抗日戰爭戰略)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그는 여기서 공산당 내 존재했던 [[중일전쟁]] 성격 논증 이론인 중국필망론(中國必亡論)과 중국속승론(中國速勝論)을 모두 비판하였다. 그는 중일전쟁이 장기화가 될 것이라 예측했으며, 이러한 장기화 된 전쟁에 걸맞는 게릴라전을 구상해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그는 군사력이 열악한 홍군의 특성과, 도시 점령을 위주로 활동하는 [[일본군]]과 당시 중국 군벌의 속성을 고려했으며, 대부분의 중국 인민이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이라는 점을 전제로 하여, 전쟁에서 자원이 되는 것은 가시적으로 보이는 군수물자와 식량만이 아닌, 인심(人心)이라고 하였다.<ref>마오쩌둥 저, 이등연 역, 『마오쩌둥 주요 문선』(학고방, 2018) pp. 99 - 113(지구전론)</ref>
 
인심(人心)은 유동적이며 물과 같다. 때문에 홍군의 주력도 유동적이어야 한다. 또한, 이러한 인심의 유동성은 곧 대중의 요구에 부여된 유동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니, 전쟁 속에서도 대중의 요구를 충족시켜서 지지를 얻어야 한다. 그러나 도시에 속한 인민은 군벌의 손아귀에 있으며, 군벌의 지배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인민은 농촌 지역에 있는 농민이다. [[마오쩌둥]]은 이들의 인심을 얻어 그것을 힘으로 사용하는 '고도로 정치화 된 군대'를 조직했다. 그는 아울러 도시를 점(点), 도로를 선(線), 농촌을 면(面)으로 구분한 다음, 일정하게 뭉쳐져 있는 면의 집단을 구(區)라고 칭하였으며, 공산당의 영향력이 확고한 구(區)를 해방구(解放區)라고 칭했다. 여기서 그는 해방구의 단위를 이루는 면(面)의 유동성과 신축성을 조명하며, 해방구는 유동적이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면이 유동적인 이유는 적군의 감시가 이뤄지기 힘들며, 넓은 면적을 갖고 있기에 이동 범위가 넓기 때문이다. 또한, 신축성이 높은 이유는, 면의 대부분이 농촌이고, 농촌은 식량을 담당하는 식량기지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공산당에 대적하는 적이 설사 해당 지역이 해방구의 일부라는 것을 안다고 하더라고 쉽사리 그곳 지역을 탈환하기 어렵다. 또한, 농촌은 대가족 사회이므로 인민이 서로 끈끈하게 연결되어있다. 따라서 작은 탄압도 커다란 반발을 불러올 수 있다. 만약 다른 곳의 해방구가 무너진다면, 즉각적으로 해방구가 아닌 곳을 해방구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이것들 외에도 주도성, 계획성 등의 개념이 나오며, 전투 방식으로는 유격전, 진지전, 기동전, 소모전, 섬멸전 등을 들고 있다. 마지막으로 지구전론에서 마오쩌둥은 병사 개개의 역량 강화를 강조하고 있다. 혁명에 나선 병사는 단순히 전투와 수동적 복종을 위한 병사가 아닌, 매사 스스로 다양한 지식을 학습하고 인민으로부터 배우는 동시에 그들의 혁명 역량을 고취시킬 수 있는 이념의 선구자가 되어야 한다. 즉, 마오쩌둥 사상에서 병사 개개의 정예주의(精銳主義)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승리는 "인심을 얼마나 얻느냐", 그리고 "유격전을 어떻게 지휘하느냐", 마지막으로 "병사의 지적 역량을 얼마나 발전시키느냐"에 따라 달렸다. 바로 이 능력 전반을 지구력(持久力)이라고 하였기에 『지구전론』(持久戰論)이라 한 것이다.<ref>마오쩌둥 저, 이등연 역, 『마오쩌둥 주요 문선』(학고방, 2018) pp. 139 - 171(지구전론)</ref>
 
『지구전론』의 특이할 점은, 군사 행위는 단순한 무력 충돌이 아닌 고도의 정치라는 점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결국 지구전론은 단순히 무력이 총동원되는 전쟁 상황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논리가 아니다. 이는 문화투쟁과 정당투쟁에서도 사용될 수 있는 논리이다.
== 인식 이론 ==
=== 모순 ===
마오쩌둥 사상은 기본적으로 이오시프 스탈린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기반하며, 스탈린의 공산주의 정립을 정설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마오쩌둥 사상은 중국 현실에 맞는 〈발전된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가치를 내세우고 있기에 일부 이론에서 스탈린의 이론과 차이점이 존재한다. 특히, 모순론(생산관계로 인해 발생하는 변증법적 모순에 대한 이론)은 [[1920년대]] 데보린 학파에 의해 전개된 유물변증법과 더불어 [[이오시프 스탈린]]이 『레닌주의의 기초와 레닌주의의 제문제』에서 밝힌 모순론과 비교되는 입장을 갖고 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모순과 사회주의 사회에서 그 모순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모순의 본질은 제반경제투쟁에서 발생하는 모순과 일치하며, 그것은 어떻게 하든 현실에서 계급 투쟁(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의 형태로 발생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의해 지도되는 사회주의 정체는 모순이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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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마오쩌둥의 모순론의 정식대로라면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격화된 양분의 대립은 계급 투쟁의 성격을 갖는 것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대립은 모순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사회주의국가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사회주의국가 운영의 핵심은 이러한 모순을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것에 달렸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마오주의자들이 더더욱 현실 문제에 깊숙히 관여할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되었다. 마오쩌둥 사상은 제3세계 운동, [[여성주의]]와 흑인해방운동을 포함하여 갖가지 해방운동에 기반 이론을 제공한 것이다.<ref>허만원 저, 주혜란 역, 『생각의 역사』(이른아침, 2005) 참조</ref>
 
=== 실천론실천 ===
마오쩌둥에게 실천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정치 투쟁이 아닌 사고와 사고 사이의 전쟁도 포함한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실천론은 전자의 논리로 설명되는 경우가 많다. 그는 혁명가가 군중 속에 들어가서 군중의 삶을 직접 겪으며, 군중의 지식을 배워야 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그의 게릴라 이론 저서인 『지구전론』(持久戰論)<ref>인민전쟁론이라고 칭해지기도 한다.</ref>에서도 일관적으로 나오는 입장이다. 또한, 군중 속에 들어가는 주체는 개인 한 사람이 아니라 [[공산당]]과 같은 혁명적 당도 포함된다. 혁명적 당의 최고 적은 군중과 괴리되는 것이며, 이러한 군중과의 괴리, 즉, [[관료주의]]를 막기 위해서는 당이 군중에 의거해야 하며,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군중 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ref>마오쩌둥 저, 김승일 역, 『실천론 모순론외』(범우사, 2001) pp. 31 - 3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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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나온 것이 계속혁명론(繼續革命論)이다. 당이 관료주의를 막기 위해서는 [[공산주의]] 도달까지 끝이 없는 정치투쟁을 내부로부터 감행해야 한다. 그것은 혁명적 군중에 의한 대규모 켐페인 등과 같은 정치운동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으며, 역사적 사건으로는 [[문화대혁명]]이 있다.
== 정치 이론 ==
 
=== 지구전론반수정주의 ===
『지구전론』은 [[마오쩌둥]]이 [[옌안]]에서 [[1938년]] [[5월 26일]] ~ [[1938년]] [[6월 3일]]까지 논의한 『항일전쟁전략』(抗日戰爭戰略)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그는 여기서 공산당 내 존재했던 [[중일전쟁]] 성격 논증 이론인 중국필망론(中國必亡論)과 중국속승론(中國速勝論)을 모두 비판하였다. 그는 중일전쟁이 장기화가 될 것이라 예측했으며, 이러한 장기화 된 전쟁에 걸맞는 게릴라전을 구상해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그는 군사력이 열악한 홍군의 특성과, 도시 점령을 위주로 활동하는 [[일본군]]과 당시 중국 군벌의 속성을 고려했으며, 대부분의 중국 인민이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이라는 점을 전제로 하여, 전쟁에서 자원이 되는 것은 가시적으로 보이는 군수물자와 식량만이 아닌, 인심(人心)이라고 하였다.<ref>마오쩌둥 저, 이등연 역, 『마오쩌둥 주요 문선』(학고방, 2018) pp. 99 - 113(지구전론)</ref>
 
인심(人心)은 유동적이며 물과 같다. 때문에 홍군의 주력도 유동적이어야 한다. 또한, 이러한 인심의 유동성은 곧 대중의 요구에 부여된 유동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니, 전쟁 속에서도 대중의 요구를 충족시켜서 지지를 얻어야 한다. 그러나 도시에 속한 인민은 군벌의 손아귀에 있으며, 군벌의 지배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인민은 농촌 지역에 있는 농민이다. [[마오쩌둥]]은 이들의 인심을 얻어 그것을 힘으로 사용하는 '고도로 정치화 된 군대'를 조직했다. 그는 아울러 도시를 점(点), 도로를 선(線), 농촌을 면(面)으로 구분한 다음, 일정하게 뭉쳐져 있는 면의 집단을 구(區)라고 칭하였으며, 공산당의 영향력이 확고한 구(區)를 해방구(解放區)라고 칭했다. 여기서 그는 해방구의 단위를 이루는 면(面)의 유동성과 신축성을 조명하며, 해방구는 유동적이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면이 유동적인 이유는 적군의 감시가 이뤄지기 힘들며, 넓은 면적을 갖고 있기에 이동 범위가 넓기 때문이다. 또한, 신축성이 높은 이유는, 면의 대부분이 농촌이고, 농촌은 식량을 담당하는 식량기지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공산당에 대적하는 적이 설사 해당 지역이 해방구의 일부라는 것을 안다고 하더라고 쉽사리 그곳 지역을 탈환하기 어렵다. 또한, 농촌은 대가족 사회이므로 인민이 서로 끈끈하게 연결되어있다. 따라서 작은 탄압도 커다란 반발을 불러올 수 있다. 만약 다른 곳의 해방구가 무너진다면, 즉각적으로 해방구가 아닌 곳을 해방구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이것들 외에도 주도성, 계획성 등의 개념이 나오며, 전투 방식으로는 유격전, 진지전, 기동전, 소모전, 섬멸전 등을 들고 있다. 마지막으로 지구전론에서 마오쩌둥은 병사 개개의 역량 강화를 강조하고 있다. 혁명에 나선 병사는 단순히 전투와 수동적 복종을 위한 병사가 아닌, 매사 스스로 다양한 지식을 학습하고 인민으로부터 배우는 동시에 그들의 혁명 역량을 고취시킬 수 있는 이념의 선구자가 되어야 한다. 즉, 마오쩌둥 사상에서 병사 개개의 정예주의(精銳主義)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승리는 "인심을 얼마나 얻느냐", 그리고 "유격전을 어떻게 지휘하느냐", 마지막으로 "병사의 지적 역량을 얼마나 발전시키느냐"에 따라 달렸다. 바로 이 능력 전반을 지구력(持久力)이라고 하였기에 『지구전론』(持久戰論)이라 한 것이다.<ref>마오쩌둥 저, 이등연 역, 『마오쩌둥 주요 문선』(학고방, 2018) pp. 139 - 171(지구전론)</ref>
 
『지구전론』의 특이할 점은, 군사 행위는 단순한 무력 충돌이 아닌 고도의 정치라는 점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결국 지구전론은 단순히 무력이 총동원되는 전쟁 상황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논리가 아니다. 이는 문화투쟁과 정당투쟁에서도 사용될 수 있는 논리이다.
 
== 신민주주의론 ==
[[마오쩌둥]]은 [[태평천국의 난]]을 시작으로 하여 [[신해혁명]]을 끝으로 [[중국]]이 반봉건-반자본주의(半封建半資本主義) 정체성(政體性)을 확보했다고 봤다. 그러나 앞선 단어에서 유추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완전한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바로 여기서 [[마오쩌둥]]은 확고한 자본주의 사회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을 신삼민주의(新三民主義)라 칭하였고, 앞서 서술한 반봉건-반자본주의(半封建半資本主義)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구삼민주의(舊三民主義)라고 규정하였다.<ref>마오쩌둥 저, 이등연 역, 『마오쩌둥 주요 문선』(학고방, 2018) pp. 193 - 198(신민주주의론)</ref> 그러나, 신삼민주의자들의 염원은 열강 세력의 침탈을 통해 이루기 요원한 것이 되었다. 마오쩌둥은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형태의 인민정권을 구상하여 민족자본가와 노동자, 그리고 농민 세력이 연합된 신민주주의정부(新民主主義政府)를 건설하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운동의 흐름을 '반제반봉건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反帝反封建資產階級民主革命)이라 칭한다. 이러한 그의 단계론 해석은 이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던 단계론과 상당히 다른 것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그는 바로 소비에트 사회주의 체제로 나아가야 한다는 극좌모험주의적 경향과 당시의 권위주의적 군벌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반동적 의견을 모두 비판하였다.<ref>마오쩌둥 저, 이등연 역, 『마오쩌둥 주요 문선』(학고방, 2018) pp. 213 - 227(신민주주의론)</ref> 그리고 이러한 노선은 [[1930년대]] [[김일성]]이 이끌던 빨치산파에 의해 수용되었으며,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인 [[호치민]]도 또한, 이 노선을 받아들인다. [[대한민국]]의 경우는 [[1980년대]] [[민족 해방]] 학생운동계파가 한국 사회의 성격을 이 노선에 기반하여 해석했으며, [[민중 민주]] 계파의 사회구성체론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신민주주의론은 인구의 대다수가 농민인 것과 동시에, 반공주의적 정서가 강했던 당시 중국 현실을 반영한 특수한 형태의 단계론인 것이다. [[마오쩌둥]]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에도 해당 시점의 단계를 신민주주의 단계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그는 당시 중국 내 정파였던 민주연맹과 같은 자유주의자들과도 연합한다. 그리고 [[1958년]]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생산력을 산출하기 위한 [[대약진운동]]이 시작됐는데, 이도 역시 신민주주의론에 기초하여 시작된, 자주적인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생산력 증강 정책이기도 하였다. 국유화, 국가 주도의 산업 자본 투자, 외세의 개입 차단, 민족자본가들과의 통일전선 등을 통한 자력 발전 요소는 [[종속 이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 반수정주의 ==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 이후 소련은 노골적으로 자본주의국가와의 타협을 시도했으며, 과거 이오시프 스탈린의 이론적 경향성에 대해서 청산주의 입장을 보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중소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마오쩌둥]]은 흐루쇼프가 [[사회제국주의]](社會帝國主義) 정책을 취하고 있으며, 당을 수정주의로 지도하여 혁명의 퇴조를 가져온다고 비판하였다.<ref>{{저널 인용|last1=Scalapino |first1=Robert A. |year=1964 |title=Sino-Soviet Competition in Africa |journal=Foreign Affairs |volume=42 |issue=4|pages=640–654 |jstor=20029719|doi=10.2307/20029719 }}</ref> 그리고 그는 동유럽 지역에서 소련의 수정주의를 격렬하게 비판하던 알바니아의 [[엔베르 호자]]({{llang|sq|Enver Hoxha}})와 협력하게 된다. 엔베르 호자는 스탈린 정식을 따르는 철저한 스탈린주의자로, 소련의 수정주의를 비판하는 마오쩌둥의 사상을 받아들였고, 그 결과 교류가 오가면서 마오쩌둥 사상은 '아시아의 반수정주의'로 거듭나게 되었다.<ref>{{저널 인용|last=Marku|first=Ylber|date=2019-05-30|title=Communist Relations in Crisis: The End of Soviet-Albanian Relations, and the Sino-Soviet Split, 1960–1961|url=https://doi.org/10.1080/07075332.2019.1620825|journal=The International History Review|volume=0|issue=0|pages=1–20|doi=10.1080/07075332.2019.1620825|issn=0707-5332}}</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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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사상은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재평가가 되었고, 기존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계승 및 발전시킨 대표적인 사상으로 인식되었다. '공산당 ML파' 또는 'ML당' 등의 명칭을 갖고 있는 정당이 마오쩌둥 사상을 양대 사상으로 내놓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현재 반수정주의 국제 단체인 'ML당-ML조직 국제회의'(International Conference of Marxist–Leninist Parties and Organizations, ICMLPO)<ref name="fish">{{웹 인용|url=http://www.xinminnews.com/portal.php?mod=view&aid=63|title=国际毛主义运动历史与现状|accessdate=2012|publisher=新民通讯|work=|language=zh-hans|deadurl=yes|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41015153811/http://www.xinminnews.com/portal.php?mod=view&aid=63|archivedate=2014-10-15}}</ref>와 '혁명당-혁명조직 국제협력'(International Coordination of Revolutionary Parties and Organizations, ICOR)<ref name="FR">[http://icor.info/2010/ICOR%20Founding%20Conference_Documents_CD01_US.pdf#page=11] {{Web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10818071921/http://icor.info/2010/ICOR%20Founding%20Conference_Documents_CD01_US.pdf#page=11 |date=18 August 2011 }} ICOR Founding Conference – Documents US: Founding Resolution of the ICOR</ref>이 마오쩌둥 사상을 공식 이념으로 표방하고 있다.
=== 신민주주의 ===
[[마오쩌둥]]은 [[태평천국의 난]]을 시작으로 하여 [[신해혁명]]을 끝으로 [[중국]]이 반봉건-반자본주의(半封建半資本主義) 정체성(政體性)을 확보했다고 봤다. 그러나 앞선 단어에서 유추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완전한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바로 여기서 [[마오쩌둥]]은 확고한 자본주의 사회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을 신삼민주의(新三民主義)라 칭하였고, 앞서 서술한 반봉건-반자본주의(半封建半資本主義)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구삼민주의(舊三民主義)라고 규정하였다.<ref>마오쩌둥 저, 이등연 역, 『마오쩌둥 주요 문선』(학고방, 2018) pp. 193 - 198(신민주주의론)</ref> 그러나, 신삼민주의자들의 염원은 열강 세력의 침탈을 통해 이루기 요원한 것이 되었다. 마오쩌둥은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형태의 인민정권을 구상하여 민족자본가와 노동자, 그리고 농민 세력이 연합된 신민주주의정부(新民主主義政府)를 건설하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운동의 흐름을 '반제반봉건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反帝反封建資產階級民主革命)이라 칭한다. 이러한 그의 단계론 해석은 이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던 단계론과 상당히 다른 것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그는 바로 소비에트 사회주의 체제로 나아가야 한다는 극좌모험주의적 경향과 당시의 권위주의적 군벌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반동적 의견을 모두 비판하였다.<ref>마오쩌둥 저, 이등연 역, 『마오쩌둥 주요 문선』(학고방, 2018) pp. 213 - 227(신민주주의론)</ref> 그리고 이러한 노선은 [[1930년대]] [[김일성]]이 이끌던 빨치산파에 의해 수용되었으며,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인 [[호치민]]도 또한, 이 노선을 받아들인다. [[대한민국]]의 경우는 [[1980년대]] [[민족 해방]] 학생운동계파가 한국 사회의 성격을 이 노선에 기반하여 해석했으며, [[민중 민주]] 계파의 사회구성체론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신민주주의론은 인구의 대다수가 농민인 것과 동시에, 반공주의적 정서가 강했던 당시 중국 현실을 반영한 특수한 형태의 단계론인 것이다. [[마오쩌둥]]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에도 해당 시점의 단계를 신민주주의 단계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그는 당시 중국 내 정파였던 민주연맹과 같은 자유주의자들과도 연합한다. 그리고 [[1958년]]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생산력을 산출하기 위한 [[대약진운동]]이 시작됐는데, 이도 역시 신민주주의론에 기초하여 시작된, 자주적인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생산력 증강 정책이기도 하였다. 국유화, 국가 주도의 산업 자본 투자, 외세의 개입 차단, 민족자본가들과의 통일전선 등을 통한 자력 발전 요소는 [[종속 이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 마오주의 조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