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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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재차 쓰시마 국주를 이용하여 조선에 교섭을 청하였는데, 그들은 명나라와 사대외교를 하고 싶어하였다. 이에 조선의 조정에서는 오랜 논의 끝에 1590년([[조선 선조|선조]] 23년)에 일본의 요구에 대한 응대와 더불어 일본내의 실정과 히데요시의 저의를 살피고자 [[황윤길]]을 통신사로, [[김성일 (학자)|김성일]]을 부사로, 그리고 [[허성]]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하여 일본에 파견했다.
 
1591년 음력 3월 통신사 편에 보내온 히데요시의 답서에는 정명가도(征明假道)의 문자가 있어 그 침략의 의도가 분명하였으나, 통신사와 부사의 의견은 일치하지 않았다. 당시 [[서인]]을 대표하였던 정사 [[황윤길]]은 '반드시 유병화(類兵禍)가 있을 것'이라고 하고, 반면에 [[동인]]을 대표하였던 [[김성일]]은 이에 반대하여 '그러한 정상이 없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민심을 동요시킨다'고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조신 간에 의견이 분분하였고 동인인 [[허성]]마저 황윤길의 명견을 옹호하였으나, 당시 정권을 장악한 세력으로서 백성이 동요하면 자신이 향유하던 권력에 초래될 변화를 두려워했던 동인이 주도권을 주도하던 조선 조정은 김성일의 의견을 좇았다. 그러나 류성룡은 김성일을 두둔하고자 하였는지, 그의 저서 징비록에 밝히기를, 김성일 역시 일본의 침략의지를 간파하였으나, 괜한 말로 조정과 신민을 동요케하고 싶지 않았음으로 거짓으로 임금께 보고하였고 통신사 황윤길을 꾸짖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그 두 대신의 극명하게 달랐던 주장과는 상관없이 조선의 조정은 왜적의 침략에 대한 방비를 서둘렀다.<ref> {{웹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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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통신사 황윤길 등이 왜 사신 평조신 등과 돌아오다
|확인날짜 = 2009-02-14|저자 = |날짜 = 1591-03-01|출판사 = 조선왕조실록|원본일자 = |인용 = }} </ref>
 
==== 군사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