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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손권은 황제를 칭한 후 점차 독단적이고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중신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공손연]](公孫淵)과 화친하려 했다가 사자의 목숨과 예물만 빼앗겼으며, 단주(亶州)와 이주(夷州)의 주민을 잡아와 인구를 늘리려 했으나 사로잡은 사람들에 비해 보냈다 죽은 군사가 많아 큰 손해를 보았다. 결정적인 것은 후계자 선정 실패로, 오나라를 쇠퇴에 빠트려 결국 멸망길에 들어서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태자 [[손등 (오나라)|손등]](孫登)이 손권 재위 중에 죽자 손권은 [[손화]](孫和)를 새로운 태자로 내세우지만, 동시에 손화의 동생 [[손패]](孫覇)도 아껴 노왕(魯王)으로 봉하고 태자와 동등하게 취급했다. 그래서 신하들도 손화파와 손패파로 갈라져 서로 싸우게 된다. 당시 승상(丞相)인 [[육손]](陸遜)이 “적자와 서자 사이에는 마땅히 차별을 두어야 한다”고 간언하지만, 손권은 듣지 않고 오히려 손패파의 참언을 믿어 육손은 유형에 처해지고 곧이어 분사하고 만다. 이 권력 투쟁에서 유능한 신하 수십 명이 방출되거나 처형되었다. [[적오]](赤烏) 13년([[250년]]), 손권은 손화를 태자 자리에서 내쫓고 동시에 [[태자]]로 즉위하려고 한 손패에게 자결을 명해 결국 막내아들인 [[손량]](孫亮)을 태자로 세우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파벌 양쪽을 중벌에 처한 손권의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미 손권 자신의 결단으로 인한 손화파와 손패파의 대립으로 촉발된 신하들 간의 파벌 싸움은 폐제 시대까지 피로 피를 씻는 꼴로 이어져 나라를 혼란에 빠트렸다. 2년 후 손권은 아직 10살밖에 되지 않은 손량을 남기고 죽고 만다.
 
그 후 손량의 치세에 정권을 장악한 [[제갈각]](諸葛恪)은 처음에는 선정을 펼쳐 널리 민심을 얻고, 동흥 전투에서 승전하여 그 명망이 한때 드높았다. 그러나 그로 인해 교만해져 20만 대군을 무리하게 징발하여 합비신성을 공격하였다가 대패하여 민심을 잃었고, 돌아와서는 자기 실패를 가리는 데 급급하고 다시 출정하려 하여 동료들을 두렵게 했다. 마침내 [[손준]](孫峻)이 손량과 공모하여 제갈각을 죽이고, 손준은 실권을 쥐고 제갈각을 능가하는 만행을 벌여 오나라는 더욱 어지러워졌다. 손준이 죽자 그 권세는 손준의 종제 [[손침]](孫綝)에게 넘어갔으나 손침의 정치는 손준과 다를 것이 없었으며, 더욱이 [[제갈탄]](諸葛誕)의 난을 효과적으로 돕기는커녕 오히려 패퇴를 거듭하고 마침내 제갈탄을 지켜내지 못했으므로 원성이 자자했다. [[영안 (오)|영안]](永安) 원년([[258년]]), 손량은 실권을 장악한 손침을 주살하려다가 실패하였다. 손침은 손량을 내쫓고 폐제의 형이며 손권의 여섯째 아들인 [[손휴]](孫休)를 황제로 옹립하니 곧 오 경제(景帝)다. 경제는 손침과 대립하던 끝에, [[장포 (동오)|장포]](張布) · [[정봉]](丁奉)과 모의해 그를 체포해 처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