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기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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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기원'''(檀君紀元) 또는 '''단기'''(檀紀)는 [[한민족]]의 역사가 시작되는 시점인 [[단군]]의 [[고조선]] 건국 연대를 기준으로 하는 상징적인 기년이다. [[그레고리력]]을 기준으로 [[기원전 2333년]]이 단기 1년으로, [[서력 기원|서기]] [[2019년|2019]][[{{현재년}}년|년]]은 단기 {{#expr: {{#time:Y}}+2333|4352=}}년이 된다.(단군 기원 = 서력 기원 + 2333년)
단기는 전설에 따른 것으로 사실인지는 아직 확인되진 않았다. 전근대 한민족의 조상들이
== 역사 ==
단군과 단군기원의 연대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이다. [[일연]]은 이 책에서 “[[단군왕검]]은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불렀다.”라고 하였다. 또한 그곳에 “[[요임금]] 즉위 원년은 무진년이니 즉위 50년은 정사년이지 경인년이 아니다.”라고 할주를 달았다. <ref>[[#일연 (1281)|일연 (1281)]] 古朝鮮 조(條) “[...] 이가 곧 단군 왕검이다. [그는] 당고(唐高)가 왕위에 오른 지 50년이 되는 경인(庚寅)년 {{할주|당의 요(堯)임금 즉위 원년은 무진(戊辰)인즉 50년은 정사(丁巳)요 경인이 아니다. [사실이] 아닐까 의심스럽다.}}에 평양성 {{할주|지금의 서경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ref>
| id={{ISBN|978-89-91221-31-4}} | 쪽= 285~286}}</ref>
[[이승휴]](李承休)가 지은 《[[제왕운기]]》 동국군왕개국연대(東國君王開國年代)에는 [[제석천]](帝釋天, [[옥황상제]])의 손자 [[단군]]이 제고(帝高)와 같은 무진년에 즉위하여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神)이 되었는데, 그 동안 나라를 다스린 기간이 1,028년이라 했으며, 그 뒤 164년이 되는 주(周)나라의 호왕(虎王, 武王) 원년 기묘에 [[기자 (고조선)|기자]](箕子)가 [[조선]]으로 도망 와서 나라를 세웠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이승휴의 연대 기록은 당시의 전근대 역사학의 기준으로도 오류가 있는데, [[주나라]] 무왕 원년으로 전근대 역사학에서 공인되어 있던 기묘년([[기원전 1122년]])을 중심으로 계산하면 《제왕운기》에서 단군이 즉위한 해는 [[기원전 2313년]]이 되며 이 해는 무진년이 아니다. 대체로 학계에서는 1,028년을 1,048년의 오기로 보며, 이렇게 보정하면 무진년([[기원전 2333년]])이 된다.
한편 단군기원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사]]》 열전 '[[백문보]](白文寶, 1303~1374)'조(條)로,
{{인용문|[[하늘]]의 기수(氣數)는 순환하여 700년이 한 소원(小元)이 되고, 3,600년이 쌓이면 한 대주원(大周元)이 되니, 이것이 황제(皇帝)와 왕패(王覇)의 치난흥쇠(治難興衰)의 기회가 됩니다. 우리 동방은 [[단군]]부터 지금([[1362년]])까지 이미 3,600년이므로 주년(周年)의 기회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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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이가 [[단군]](檀君)이며 국호(國號)는 [[고조선|조선]](朝鮮)이었는데, 바로 [[요 (군주)|당요]](唐堯) 무진년(戊辰年: [[기원전 2333년]])이었다.}}
<br />
== 단기폐지 논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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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사회 일각과 [[국회의원]]들 일부에서는 국제적으로 많이 쓰고 있는 서기와 함께 우리의 주체성을 함께 살리는 단기를 병용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어왔다. 단기병용론자들은 분단된 남북의 동질성 회복과 민족 통일을 위해서도 [[개천절]]의 의의와 가치를 재조명해야 하므로, 단기 연호는 부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법제처]]는 [[2012년]] [[7월 8일]] "[[대한민국]]의 공용연호는 서기이며, 단기를 함께 쓸 경우 불기(佛
== 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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