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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본문|다롄의 역사}}
위진 시대에는 삼산이라 불렀고 [[고구려]]가 다롄을 정복하고 한국인들은 다롄에 사는 한족(漢族)들을 정복하여지배하며 요동성이라고 불렀다. 삼산포, 삼산해구, 청니와구라고 칭했다. 1880년 대에 청나라가 다롄만 북쪽 해안에 포대를 쌓아 올려,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청일전쟁]] 후 [[1898년]], 삼국 간섭의 대상으로서 청으로부터 관동주(다롄, 뤼순 등)를 조차한 [[러시아 제국|러시아]]가 둥칭철도의 종착역을 마련해 「'''다르니'''」(Дальний; 「멀다」)라고 명명했다. [[뤼순]]에 있는 함대와 요새의 물자를 보급하기 위해, 또 무역의 거점 항구로 정비하여 [[파리 (도시)|파리]]를 모델로 한 도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1904년에 발발한 [[러일전쟁]]에 의해, 동년 5월 말에는 일본군이 무혈 입성하여, 전후 1905년 [[포츠머스 조약]]을 맺어 [[일본 제국|일본]]에 조차권을 양도했다. 일본은 고지도의 중국어의 지명 「다롄만」에서 나온 「다롄」을 도시명으로서 채용했다. 이는 러시아 지명 다리니와도 발음이 비슷하게 연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