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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을 종식시킨 헤이그 원탁 회의에서 이 지역의 귀속 문제는 난항을 겪었고, [[네덜란드령 뉴기니]](1949년-1962년)는 네덜란드에 남았다. [[1952년]] 네덜란드는 [[파푸아인]]의 자치권과 자결권을 인정하고 독립 준비를 진행하였고, [[국경선신성의 원칙]](Uti possidetis juris)에 따라 이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인도네시아]]와 대립하였다.
 
[[소련]]의 군사 원조를 받아 군비를 확장한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대통령은 [[1960년]] 네덜란드와의 국교 단절 및 무력에 의한 해결의지를 밝히는 한편 이 지역 문제를 유엔에 제소했다. [[1961년]] 말 네덜란드가 서뉴기니의 의회 선거를 진행하고 9년 뒤에 독립시킬 준비를 하였으며, 12월 1일 의원들이 [[서파푸아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국기([[아침별기]])와 국가 표어를 제정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네덜란드는 서파푸아 공화국의 독립은 당장 인정하지 않고 해당 깃발과 표어를 서뉴기니 지역의 깃발과 표어로 인정하였다. 이에 [[12월 18일]] 인도네시아가 서파푸아의 독립은 인정할 수 없으며 막기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인도네시아군이 서파푸아를 침공하겠다고 선언하고, 1962년에 공격을 진행했다. 네덜란드군은 인도네시아의 공격을 방어하는데는 성공하였다.
 
이에 [[12월 18일]] 인도네시아가 서파푸아의 독립은 인정할 수 없으며 막기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인도네시아군이 서파푸아를 침공하겠다고 선언하고, 1962년에 공격을 진행했다. 네덜란드군은 인도네시아의 공격을 방어하는데는 성공하였다.
 
인도네시아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미국]]이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양측을 중재해 [[뉴욕 협정]]이 체결되어 1969년까지 자유로운 성인의 참여로 독립여부를 결정하는 조건([[자유선택행동]])으로 서파푸아는 [[1962년]] 10월 유엔의 관리하에 놓여졌고, [[1963년]] 5월 인도네시아에 인도됐다.
 
=== 인도네시아 편입 이후 ===
[[1969년]] 인도네시아는 국가 주도로 선발된 원로들에 대해 조사한 의사를 근거로 서파푸아를 자국 영토로 편입시켰으며, 당시 80만 파푸아인들의 참여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고 인도네시아 편입에 반대하는 원로들에게 강압이 가해지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 이에 서파푸아인 사이에서 인도네시아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는 [[자유 파푸아 운동]]이 벌어졌다. 인도네시아는 [[1970년]] 이 지역을 군사작전지역으로 지정해 독립운동을 군사적으로 탄압하는 한편, 120만명 이상의 [[인도네시아인]]을 이주시켜 식민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