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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9년]](세조 4)에 종부시(宗簿寺)에서 대군가가 대(代)가 끊기어 제사봉행을 못하고 있으므로 [[효령대군]]의 6남 원천군(原川君) 의(宜)를 양자로 들여 봉사하도록 하였다.
 
이후에도 종손이 일곱 번이나 끊겼다. 훗날 이러한 사태를 딱하게 여긴 [[대한제국 고종|고종]]이 입직강관이었던 이승보에게 명하여 대군의 후손을 찾게 하고 전지(傳旨)를 내려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입직강관 이승보의 농간으로 인하여 고종의 은전을 받지 못하고 가세가 계속 기울어 고양시 대자동에서 충청도 음성으로 하향까지 하였다. 이후 성녕대군(誠寧大君)의 사후 양가 후손(死後 養家 後孫)들이 주경야독하고 후학을 양성하여 대군의 16대손에 이르러 종손가에 여유로운 훈풍이 불면서 종사가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ref>[http://www.rfo.co.kr/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웨이백|url=http://www.rfo.co.kr/ |date=20060403033806 }} 성녕대군파(태종대왕 제3남) 약사 참조</ref>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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