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에우 왕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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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남월|[[베트남]]이 [[남월]]의 정통성에 대해 주장하는 왕조|[[중국]] [[영남 (중국)|영남]] 지역에서 [[조타 (남월)|조타]]가 세운 나라}}
{{베트남의 역사}}
'''찌에우 왕조'''({{vie|v=Nhà Triệu|hn=家趙}})는 [[베트남]] 사학가들이 주장하는 [[베트남의 역사|베트남 역사]]의 한 왕조이다. 베트남 사학가들은 [[조타 (남월)|찌에우다(조타)]]가 [[진나라]] 말 [[한나라]] 초에 [[영남 (중국)|영남]] 지역에 세운 정권을 베트남 역사의 한 부분으로 간주한다.
[[기원전 207년]],
[[중국]]에서는 남월국이 [[중국인]]에 의해 세워져 지방에서 할거한 정권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베트남인]]들이 제시한 '찌에우 왕조'라는 표현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찌에우 왕조가 베트남 역사상 정통 왕조인지 아닌지는 베트남 사학계에도 논쟁의 대상이며, 이는 [[찌에우 왕조 정통성 문제]]로 비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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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우옌후에는 거대한 전선을 건조하여 베트남이 전투 시에 사용하는 큰 코끼리를 [[광저우|광주]](廣州)로 운반하고자 하였다.<ref name="pirates"/> [[1792년]], 응우옌후에는 때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해 응우옌찌에우비엔(阮招遠)을 청나라로 파견해 화친을 요청하는 동시에 청나라가 양광(兩廣)의 땅을 할양할 것을 요구하면서 이를 명분으로 전쟁의 실마리를 잡고자 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갑자기 병이 나서 사망하여 사신단이 청나라에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왔고, 이로 인해 청나라는 그 사안에 대해 알지 못했다.<ref>《皇黎一統志·第十六回》</ref><ref name="tay30">《大南正編列傳初集·卷三十·僞西列傳》</ref>
[[응우옌 왕조]] 시기에 이르러 베트남인들은 여전히 찌에우 왕조가 통치했던 양광 지역이 베트남 역사상 상실한 옛 강역이라고 간주하였다. 《대남실록(大南實錄)》의 기록에 의하면 [[민망 (연호)|민망]] 5년([[1824년]]) 겨울 11월, 승천부(承天府)의 안로(安魯) 사람 응우옌쑤언쩐(阮春振)이 [[민망 황제]]의 가마를 막고 상서하여 병사를
이와 동시에 여전히 조정 측에서는 찌에우 왕조를 베트남 역사의 일부분이라고 간주하였다. 《흠정월사통감강목(欽定越史通鑑綱目)》에는 [[뜨득 황제]]가 해당 책을 어람한 뒤 주필로 비평하기를 "전후의 일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면 우리 월(越)의 땅이 중국에 떨어진 것이 이미 태반이나 된다. 안타깝게도 역대의 명군과 양신이 또한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자가 많아 끝내 촌토를 회복할 수 없었으니 크게 한스러운 일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것으로 회복하는 것이 어려우니, 슬프다!"라고 하였다.<ref>[http://lib.nomfoundation.org/collection/1/volume/252/page/3 欽定越史通鑑綱目前編 國史館朝阮 • Khâm định Việt sử thông giám cương mục tiền biên (q.02-05) Quốc sử quán triều Nguyễn R.592 • NLVNPF-0174-02]</ref> 이는 응우옌 왕조 시기의 조정의 논점이 여전히 양광의 땅을 베트남 역사상 찌에우 왕조의 옛 강역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20세기 초에 이르러 [[쩐쫑낌]]은 《월남사략(越南史略)》을 집필할 때 남월국을 찌에우 왕조로 지칭하였고, 찌에우 왕조가 멸망한 뒤 바로 중국의 지배 시기를 맞았다고 하였다.<ref>《越南史略》,第一卷第三章</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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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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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남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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