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요시토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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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 요시토시(宗義智(そう よしとし) 1568~1615)는 일본 아즈치모모야마시대(安土桃山時代)부터 에도시대 전기의 무장으로 대마도주이며, 상인 출신의 장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사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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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토시는 5,000명의 군세를 인솔해 덴쇼(연호) 20년(선조 25년-1592년) 4월 12일에 대마도 북단의 오우라(大浦)를 출항해 부산에 상륙한다. 다음 13일에 총공격을 걸어 공략한 것을 시작으로, 4월 14일에 동래, 4월 15일에 기장, 좌수영, 4월 16일에 양산, 4월 17일에 밀양, 그 후에 대구, 인동, 선산을 차례차례로 공략해, 4월 26일에 경상도순변사 이일(李溢)을 상주에서 격파. 4월 27일에 경상도를 넘어 충청도에 진군, 탄금대의 싸움으로 요격에 나온 신립(申砬)이 인솔하는 조선군을 괴멸 시켜 충주를 공략. 경기도로 나아가 5월 1일에 여주 공략 후, 5월 2일에 용진을 거쳐 한성 동대문 앞에 도달. 다음 5월 3일에는 수도한성에 입성 한다.
 
그 후, 여러 장군과 한성회의를 실시한 후, 5월 11일에 요시토시는 한층 더 북쪽을 향해 진격해, 5월 18일에 임진강의 싸움으로 김명원(金命元)등의 조선군을 격파. 5월 27일에 개성 공략, 황해도의 서흥, 평산, 황주, 중화를 차례차례로 공략. 평안도로 나아가, 6월 8일에 대동강의 근처에 이르러, 6월 16일에는 평양을 공략했다. 여기서 진격을 정지한다.
 
7월 16일, 명의 요동 부총병 조승훈(祖承訓)이 평양을 공격해 왔지만 격퇴했다. 이 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패주 하는 명군을 추격 해, 명군장수 사유(史儒)·천총(千総) 장국충(張国忠),· 마세륭(馬世隆)등을 죽였다.7월 29일, 이원익(李元翼)이 인솔하는 조선군이 평양에 바싹 쳐들어가 왔지만 이것도 격퇴한다.
 
선조 26년(1593년) 1월 7일, 명은 이여송(李如松)을 제독으로서 약 4만명 명군에 김명원이 인솔하는 1만명의 조선군을 가세해 평양에 바싹 쳐들어갔다. 명군이 평양성의 성문을 돌파하면 일본군은 북부 구릉지역의 진지에 퇴피한다. 여기서 이여송은 「퇴로를 주기 때문에 성을 명도(明渡)할 수 있다」라고 전해 왔다. 일본군은 이것을 수락하고 남쪽을 향해 철퇴를 개시하지만 배후로부터 추격을 받아 어려운 퇴피행이 되었다. 한성을 목표로 해 진격하는 명군에 대해, 일본군은 여러 방면의 각 군을 한성에 결집한 후 출격 해, 이것을 많이 찢었다. 이것이 벽제관의 싸움이다. 명군에서는 이 패전의 결과 강화의 기운이 일어나, 일본군도 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에, 강화 교섭의 개시를 약속해 부산 주변까지 철퇴했다.
 
요시토시는 유키나가와 함께 명측의 강화 담당자·심유경(沈惟敬)등과 평화교섭에 분주 했지만, 쌍방이 요구하는 평화 조건은 합의에 동떨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국서의 내용을 쌍방으로 형편의 좋은 조건에 개찬하는 등 평화 성립을 목표로 했지만, 이러한 기만 행위를 동반하는 교섭은 아무 성과 없이, 각국에 혼란을 주어 교섭은 결렬되고 게이쵸의 역(정유재란)을 막는데는 이르지 못했다.
 
선조 30년(1597년)부터의 정유재란이 시작되자, 요시토시는 좌군에 속해 다시 임진왜란과 같은 구성원으로 행동했다. 우선 서쪽을 향해 진격해, 같은 해, 8월 13일 남원성 공략전을 개시. 4일째에 공략을 완수했다(남원성의 싸움). 다음에 전라도의 중심지인 전주를 향해 점령하고. 전라도를 제압했다. 그 후, 겨울을 앞에 두고 후퇴해, 이후 남해왜성을 재구축하지만, 선조 31년(1598년) 8월 18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조선에 파견되고 있던 일본군에 10월 15일자로 귀국 명령이 내려졌다. 소오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창선도로 집합해 모두 귀국하려는 계획이었지만, 이 때 순천 왜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 마츠우라, 아리마, 오오무라, 고토등 5명의 제 2군은 이순신(李舜臣)과 진린(陳璘)의 조,명 연합수군에 퇴각로가 저지되 순천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이것을 본 소오 요시토시는, 제 9군 대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타카하시 무네마스(高橋統増), 테라사와 마사나리(寺沢正成) 들과 함께 수군을 편성해 순천에 구원으로 향한다. 이 때 노량해협에서 매복하고 있던 조선·명 수군과 교전한 것이 노량해전이다. 고니시 유키나가등 5명의 왜장은 이 싸움의 틈새를 이용해 탈출에 성공. 소오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 들과 함께 부산을 거쳐 귀국을 완료해, 전후 7년에 이르는 조선 침략은 종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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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江戶時代) ===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임진왜란으로 악화된 조선과의 관계를 수복하라는 명령을 받은 요시토시는, 광해군 1년(1609년)에 조선과의 평화 조약을 성립시켰다(기유약조(己酉約条) 또는 게이쵸 조약).이 공적을 이에야스로부터 인정받아 소오씨는 막부로부터 독립한 기관으로 조선과 무역을 행하는 일도 허가받았다. 광해군 7년 1월 3일(1615년 1월 31일)에 사망. 향년 48세였다. 후계자는 장남·요시나리(義成)가 이었다.
광해군 7년 1월 3일(1615년 1월 31일)에 사망. 향년 48세였다. 후계자는 장남·요시나리(義成)가 이었다.
 
===인물 ===
성씨는 무로마치 막부의 제15 대장군·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로부터 [소(宗)]를 받은 것이다. 후에 히데요시로부터 우시의 성씨와 시호의 한 자를 받아 길지라고 자칭했다.
 
조선이라는 교섭을 열심히 노력하고 전쟁을 회피하려고 한 이유는, 무역에서 얻는 이해관계 외에 대마도가 조선과의 중계지에 사용되는 것을 무서워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덧붙여 에도기에 들어가 조선과의 평화 조약을 체결해 소씨는 에도 막부에 있어서의 지위가 안정되었지만, 이 때에 교섭을 성급하게 너무 했기 때문에, 장남인 요시나리 시대에 소오가문은 멸망의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향을 받고 크리스찬이었다. 세례명은 다리오다. 조선의 일본군을 위문 한 그레고리오·데·세스페데스 신부는 「지극히 신중한 젊은이로, 학식이 있어, 훌륭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평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