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두 판 사이의 차이

1,724 바이트 제거됨 ,  5개월 전
→‎사대교린 정책: 문서는 일기장이 아님.
(누가 편집했는지 모르겠다마는, 여기가 니 일기장인줄 아냐. 주관적이고 선정적인 표현 삭제함.)
(→‎사대교린 정책: 문서는 일기장이 아님.)
외교면에서는 [[명나라|명]](明)에 대해서는 형식적으로 사대정책(事大政策)을 썼다. 특히 이성계는 국호를 정하는 일에서도 내부적으로 국호를 정했으나, 명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화령(和寧)과 조선(朝鮮) 중에서 승인을 받았던 일이 있다. 이를 통하여 [[조공]](朝貢)·회사(回賜) 형식을 취한 국가 간의 무역이 행해졌다.
 
조선은 [[명나라|명]]에 대한 사대 관계에 있었다. 이는 원나라를 멸망시킨 명나라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한 외교였다. 조선은 명나라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제후국의 예를 취했다. [[1400년]] 이후 정식 국왕으로 책봉된 이후로도 명나라와의 친선을 위해 [[명나라|명]]나라에 형식적으로 관리를 파견하여 책봉 승인을 받았다. 명나라에 진하사, 문안사, 동지사 등을 파견했고 [[조선 태종|태종]] 때부터 [[조선 선조|선조]] 때까지는 종계변무사를 파견했다. 조선 개국 초기,초에는 고려의명을 명에침공하는 따라고려군의 명나라를총사령관이 정벌하러간이성계였고, 것이 이성계조선 장군이란건국 것과이후에도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강행하려 했던 문제로 [[명나라]]는 이성계를 [[조선의 역대 국왕|조선의 국왕]]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 국왕 책봉고명사신이 도착하면 이성계를 [[권지고려국사]] 혹은 [[권지고려국사|권지조선국사]]라고 불렀다. 조성의 왕을 [[조선의 역대 국왕|조선 국왕]]이라고 부른 것은 [[1401년]](태종 1년) [[조선 태종|태종]] 때였다.
조선은 [[명나라|명]]에 대한 사대 관계에 있었다. 이는 원나라를 멸망시킨 명나라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한 외교이다. 종주국,종속국이라는 단어는 현대단어로서 조선의 사서나 명나라의 사서에서는 조선이 명나라를 "종주국"이라고 부른 기록은 없다. 하지만 원나라 시절 독립국이였던 고려는 30년에 걸친 몽고와의 전쟁에서 타협하여 부마국이 되었고 [[고려]]말에 고려의 명에 따라 명나라를 공격하러 갔던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고 나서 명나라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명나라|명]]에 형식적으로 제후국의 예를 취했으나 이는 완전히 형식적인 것으로 실제론 조선은 완전히 종주국의 형태를 뛴 독립국가였다. 예를 들어 실제 명나라의 종속국이던 티베트,몽고,만주지역의 여진족들은 명나라의 관리가 직접 파견되어 중국의 기관이 설치되고 티베트에는 법왕, 몽고족, 여진족에게는 추창이라는 직책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명나라의 간접 지배를 받으며 명나라에서 파견된 관리가 실권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종주국인 조선은 이성계 때 형식적으로 명나라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제후국의 예를 취했지만 조선의 왕들은 고려 떄처럼 황제들만이 쓸 수 있는 칭호인 "종"을 쓰기를 고집하였고 조선인의 양반과 관리들이 조선을 직접 관리하였다. 이는 "내왕외제"라고 불리는 외교정책으로 조선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외교에선 왕을 칭하나 나라 안에선 황제를 칭하는 외교술을 썼다. [[1400년]] 이후 정식 국왕으로 책봉된 이후로도 명나라와의 친선을 위해 [[명나라|명]]나라에 형식적으로 관리를 파견하여 책봉 승인을 받았다.
 
또 다른 주변 국가인 [[일본]]과 [[여진족|여진]]에게는 교린 정책(交鄰政策)을 취했다. 조선은 건국 초기에 여진족의 거주지를 침공하여 조선의 영토를 확장하였다. 일부 여진족들은 조선과 사대 관계를 맺었다. 또한 조선은 왜구의 본거지인 일본의 [[대마도 정벌|대마도를 정벌]]하여 왜구의 침입을 종식시켰다. 한편으로 대마도주는 이후 조선의 신하이자 [[막부]]의 [[다이묘]]로 활동하여 이득을 취하였다. 사대 정책과 교린 정책은 조선의 기본적인 대외정책으로서 계속 계승되었다.
명나라에 진하사, 문안사, 동지사 등을 파견했고 [[조선 태종|태종]] 때부터 [[조선 선조|선조]] 때까지는 종계변무사를 파견했다. 조선 개국 초기, 고려의 명에 따라 명나라를 정벌하러간 것이 이성계 장군이란 것과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강행하려 했던 문제로 [[명나라]]는 이성계를 [[조선의 역대 국왕|조선의 국왕]]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 국왕 책봉고명사신이 도착하면 이성계를 [[권지고려국사]] 혹은 [[권지고려국사|권지조선국사]]라고 불렀다. 조성의 왕을 [[조선의 역대 국왕|조선 국왕]]이라고 부른 것은 [[1401년]](태종 1년) [[조선 태종|태종]] 때였다.
 
또 다른 주변 국가인 [[일본]]과 [[여진족|여진]]에게는 교린 정책(交鄰政策)을 취했다. 조선(朝鮮)은 여진족(女眞)을 정벌(征伐)하고 여진족들은 조선(朝鮮)을 "부모의 나라"라고 받들고 조선에 사대정책(事大政策)을 형성하였다. 또한 조선은 일본의 대마도를 정벌하고 대마도의 종주국으로서 대마도에서부터 조공을 받았다. 두 정책은 조선의 근본정책으로서 계속 계승되었다.
 
==== 제도의 정비와 문화 융성 ====
[[파일:Dongnaebusunjeoldo.jpg|섬네일|200px|《동래부순절도》]]
 
[[1592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는 20만 병력의 일본군을 조선에 대거 보내어 조선을 침략했다. 조선은 초반 [[제승방략]]체제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였고, 일본군의 [[백병전]] 능력과 신무기인 [[조총]]에 크게 고전하였다. [[부산진성]]의 [[정발 (1553년)|정발]]과 [[동래성]]의 [[송상현]]이 삽시간 만에 일본군에게 무너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관군은 잘 싸웠고 일본군의 희생자는 사망 약 100명, 중상 약 500명이었다. 그리고 상주의 [[이일]]과 충주 탄금대에서 진을 치고 있던 [[신립]]장군의 군대도 일본군이 무장한 조총에 의해 궤멸당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조선 선조|선조]]는 수도 한양을 버리고 압록강변에 있는 [[의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다. 일본군은 개전 20여 일 만에 [[한양]]에 입성하였고, 임진강 방어선도 간단히 뚫은 채 [[평양]]까지 손쉽게 점령하였다.
 
이 기세로 가면 [[의주]]도 점령될 것 같았으나,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이 [[옥포 해전|옥포]]·[[사천 해전|사천]]·[[한산도 대첩|한산도 해전]]에서 일본 [[해군|수군]]을 크게 격파해버림으로써, 일본군은 수군을 통한 보급작전에 큰 지장을 받게 되었고 더 이상 북진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일본군은 삼남 지역에서도 조선 각지의 [[의병]]과 관군의 반격을 받았고, [[조선군]]은 [[명나라]]의 지원군에 힘입어 일본군을 몰아내어 그 세력을 [[경상도]] 해안 일대로 후퇴시켰다.
 
그러나 5년 간의 지리멸렬(支離滅裂)한 휴전협상이 실패하자,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였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사]](병으로 죽음)로 일본군에게 철수 명령이 떨어졌고, [[노량 대첩]]을 끝으로 7년의 [[임진왜란]]도 막을 내렸고, 이때 [[노량 대첩]]에서 충무공 [[이순신]]장군도 일본군 장수에 의해 왼쪽 가슴 흉부에 총을 맞고 전사하였다.
 
==== 전후 복구 사업 ====
[[파일:이하응 초상.jpg|섬네일|오른쪽|200px|[[흥선대원군]]의 초상화]]
 
조선 후기 [[조선 철종|철종]]의 뒤를 이어 [[흥선대원군|흥선군 이하응]]의 어린 둘째 아들 명복이가 [[조대비]]의 양자로 하여금 왕위에 올라 [[대한제국 고종|고종]](재위 1863~1907년)이 되었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래서 정권을 잡자마자 가장 먼저 나라를 엉망으로 만든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민중들의 원망을 사고 있던 조세 제도를 개정하였다. 가장 말썽이 많던 환곡 제도를 [[사창제]]로 전환시켰고, 군역 제도를 고쳐 [[양반]]에게까지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려 노력하였다. 또한, [[붕당]]의 온상으로 인식되어 온 [[서원]]들을 사액서원을 제외하고 대부분 철폐하여 유생들의 불만을 샀다. 나아가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비변사]]를 폐지 수준으로 축소시켜,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회복시켰으며, [[대전회통]]을 편찬하여 법전을 재정비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왕권을 바로 세워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재정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타서 소실된 [[경복궁]]을 중건하는 데 재정을 투입하였다. 경복궁의 중건 외에도 [[의정부]], [[종묘]], 종친부, 육조 이하 각 관서 및 도성, 그리고 북한산성의 수축도 함께 이루어졌다. 이로써 황폐해졌던 한양이 다시한양은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으나, 그것을한양 위해재건 과정에서 수많은 백성이 세금과 강제 노동, [[당백전]](당백전으로 물가가 2배 넘게 폭등)으로 인한 엄청한 인플레이션에초인플레이션에 큰 고통을 겪어야겪었다. 해서 경복궁즈음에 타령이라는불린 판소리가[[판소리]] [[경복궁타령|경복궁 때쯤에타령]]의 나와가사에서 백성들의 고단함과 굶주림을 알 수가 있다.
 
흥선대원군이흥선대원군은 [[천주교]]를 탄압하면서강력하게 탄압했다. 프랑스인 성직자들과 천주교를 믿는 조선의 백성들을백성 수천여 처형하는명이 [[병인박해]]에서 구실처형되었다. 자국의 성직자가 삼아피살된 [[프랑스 제2제정|프랑스]] 군대를 파견해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프랑스는 조선에 대해 사과와 손해 배상, 그리고 통상을 요구하였다. 프랑스 군은 강화도를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군은조선군이 강화도프랑스군의 진격을 여러 곳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쳤고막았고, 결국 프랑스군은 수많은 재물(예로 들면 직지심체요절)과재물과 의궤들을 모두 약탈한 뒤 철수하였다([[병인양요]], [[1866년]])).
 
이로부터 5년 뒤, 이번에는 [[미국]]이 조선을 침략하였다. 미국인들은 1866년 미국 상인이 [[대동강]]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배가 불에 탄 사건([[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진실을 추궁하였다. 그리고 사과와 배상, 통상 교섭을 요구하여 왔다. 흥선대원군은 이들의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결과 미군은 강화도를 공격하였고, 그들은 조선군의 끈질긴공격하여 저항에방어하는 조선군을 이겨전멸시켰으나 결국이후 물러가고본토로 말았다돌아갔다([[신미양요]]). 미국과의 전쟁을 끝낸 후 ‘서양 오랑캐가 쳐들어왔는데, 싸우지 않으면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화친해야 하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넘기는 것’이라 적혀 있는 [[척화비]](斥和碑)가 전국 각지에 세워졌다.([[1871년]]) 이후 강력한 통상수교 거부정책(쇄국 정책)으로 서양과의 수교를 단호히 거부하여 흥선대원군의 집권 시절에는 외세가 침범하지 못했다.
 
이러한 정책은 전통적인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여 일시적인 안정은 찾을 수 있었으나, 전통 체제 안의 개혁이라는 한계 때문에 조선의 문호 개방을 늦추게 되었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청나라로부터 독립시키고, [[요동반도]]를 할양받아 [[만주]]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였다(→[[시모노세키 조약]]). 이에 불안을 느낀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 대한 [[삼국간섭]]을 시도하였다. [[대한제국 고종|고종]] 역시 일본의 영향력 증대를 막고자 [[미국]], 러시아 등과 가까운 [[김윤식 (1835년)|김윤식]], [[이범진 (1852년)|이범진]] 등으로 새로운 친러내각을 구성하고 반일정책을 구체화하였다.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의 삼국간섭을 받은 일본은 요동 반도를 잃었고, 남하하는 러시아는 조선에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흥선대원군]]을 옹립하여 조선에 친일 정권을 세우고자 일본군 수비대와 대륙낭인 등을 집합시켜 몰래 경복궁에 침입시킨 후 친러시아파인 [[명성황후]]를 처참하게 살해하였다(→[[을미사변]]). 1895년 음력 8월에 일본의 강요에 따라 김홍집을 내각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친일 내각이 구성이 된다. 이때 김홍집 내각의 개혁 정책 중 하나인 단발령은 전국에 있는 유생과 백성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 명성황후 살해 사건 [[을미사변]]은 미국인과 러시아인에게 목격되어 국제적인 문제가 되었다. 국제 사회의 비난 여론을 받고 일본 외무성은 명성황후 살해의 주동자인 미우라 공사 등을 소환하여 재판과 군법회의에 회부하였지만 일본 나가사키 고등법원은 증거 불충분을 판시하며 전원 무죄를 선고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반일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는 을미의병이 일어났으며,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선비들의 주도 아래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여 친일파와 일본의 상인 및 어인 등을 공격하고 일본군 수비대와 각지에서 교전하였다. [[을미의병]]은 유인석, 김복한, 기우만, 이강년 등이 주도하였다. 일본군이 의병 토벌로 한양을 비우게 되자 고종은 1896년 2월 11일에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고종은 [[1897년]]에 [[덕수궁]]으로 환궁하고 몇달 후 [[대한제국]]을 선포함으로써 국호로서의 조선은 더이상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 등의 나라는 조선의 황제국 선포를 인정하지 않고 조선이라 불렀다. 그런데 일본도 조선을 한국이라 부른 면도 있다.
 
== 정치 ==
익명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