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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권좌에 오른 [[조선 현종|현종]]은 [[경신대기근]]에도 불구하고 전쟁으로 고갈된 재정을 수습하고 황폐화된 조선을 복구하며 서인을 견제하는 데 힘을 썼다. 이즈음 붕당이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환국'을 [[조선 숙종|숙종]]이 빈번하게 일으키면서, 붕당정치는 견제와 균형을 통한 상호 공존 및 부패 방지라는 원칙은 퇴색되고 정권을 잡을 때마다 다른 붕당을 모조리 축출하는 일당 전제화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숙종이 총애하던 [[장희빈]]의 소생 [[조선 경종|경종]]은 [[소론]]과 [[노론]]의 알력다툼에 지쳐 재위 4년 만에 승하했다.
 
조선왕조에서 가장 오랫동안 집권한 임금인 [[영조]]는 당쟁을 혁파하기 위하여 [[탕평책]]을 폈으나 붕당정치를 완전히 청산하지는 못했고, 오히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임오화변]]이 일어났다. 이때를 전후하여 [[천주교]]가 조선 사회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조선의영조의 마지막뒤를 개혁군주이어 즉위한 [[조선 정조|정조]] 역시 [[탕평책]]을 폈을 뿐만아니라뿐만 아니라 [[정약용]]과 같은 [[실학]]자들을 발굴하여 [[수원 화성]]을 축성하는 등 개혁 정치를 시도했지만 1800년 갑작스럽게 사망한다사망했다. 정조가이후 사망하면서세도 조선의정치가 국운은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고,시작되어 19세기 [[조선 순조|순조]]·[[조선 헌종|헌종]]·[[조선 철종|철종]] 3대에 걸쳐지속되었다. 안동 김씨와기간 풍양동안 조씨조선은 급격한 외척쇠퇴를 세력의 세도 정치가 60여 년 동안 계속되면서 나락으로 떨어진다맞이했다. 이들 외척가문은 왕위 임명에도 손을 대는 등 부정부패 속에서의 절대권력을 누렸다. 그러던 가운데 흥선군 [[이하응]]이 풍양 조씨의 대표 [[신정왕후 (조선)|조대비]]와 결탁하여 둘째아들 명복을 조선 국왕 자리에 올리는데, 바로 [[조선 고종|고종]]이다.
 
흥선군은 [[흥선대원군]]이 되어 고종을 배후에서 조종하였다. 그는 붕당의 근원인 서원을 철폐하고 외척 가문인 안동 김씨 세력들을 축출하는 등 무소불위의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프랑스]]와 [[미국]]의 통상 강요와 협박에는 [[통상수교 거부정책]]으로 응수했다. 1873년에 [[최익현]]이 흥선대원군을 탄핵하였고, 이로서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나 실권자는 고종의 부인 [[명성황후|민비]]였다.
 
민비는 민씨 일가를 국가 요직에 대거 임명하여 조정을 휘어잡은장악한 뒤, 대외적으로 문호를 개방했다. 1876년에는 조선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일본 제국]]과 체결하였다. 1882년에는 구식 군인들이 [[별기군]]과의 차별대우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고([[임오군란]]), 1884년에는 [[김옥균]] 등이 주도하여 개화정권을 수립했다가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갑신정변]]). 1894년에는 농민 수탈에 저항하여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한때 농민 자치를 실현했고, 이어서는 친일 성향이 짙은 [[갑오개혁]]이 발표되었다. 1895년에 일제가 친러파 민비를 암살하자([[을미사변]])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몰래 [[아관파천]]을 감행하여 러시아 주한 공사관에 1년 동안 피신했다. 1897년 11월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이 경운궁의 편액을 [[덕수궁]]으로 고쳐 쓰고, 원구단과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 국호 ==
1388년 고려의 무신이었던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계기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창왕·공양왕 등을 왕위에 올렸다가 폐위시키는 등 정권·군권을 장악하고 전제 개혁을 단행하여 경제적인 실권까지 장악했다. 이어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으로 인하여 정몽주가 제거되고 1392년 7월 이성계는 공양왕의 왕위를 물려받아 새 왕조를 개국하여 [[조선 태조|태조]](재위 1392년 ~ 1398년)가 되었다.<ref>[[#태조실록 1413|태조실록 (1413)]]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107017_001 1권, 태조 1년 7월 17일 병신 1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s:태조강헌대왕실록/1년|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1년]]〉7월 17일, 태조가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였다.</ref>
 
1393년에는 국명을 [[명나라|명]]으로부터 선택받아 조선으로 고치고<ref>[[#태조실록 1413|태조실록 (1413)]]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202015_001 3권, 태조 2년 2월 15일 경인 1번째기사]</ref> 1394년에는 [[개경]]의 민심이 안 좋아 한양으로 천도하여<ref>[[#태조실록 1413|태조실록 (1413)]]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310025_001 6권, 태조 3년 10월 25일 신묘 1번째기사]</ref> 여러 개혁을 단행했다. [[조선 태조|태조]]는 재위기간 동안 [[개국공신]]에게 권력을 거의 다 주어 특별히 한 업적은 없었다. 그러던 중 개국공신들이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것에 반감을 가진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1398년]])을 일으켜<ref>[[#태조실록 1413|태조실록 (1413)]]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708026_001 14권, 태조 7년 8월 26일 기사 1번째기사]</ref> 정권을 장악하다가, [[1400년]] [[조선 정종|정종]](재위 1398~1400년)의 선위로 집권했다. [[조선 태종|태종]] [[이방원]](재위 1400~18년)은 왕권을 강화하고 [[왕|임금]]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관료 제도를 정비했다.
 
[[세종대왕]](재위 1418~1450년)은 학문 · 군사 · 과학 · 문화 등 모든 면에서 큰 업적을 이룩하였고 정치는 안정되어갔다. [[조선 세조|세조]](재위 1455~68년)는 [[조선 태종|태종]]처럼 신하의 권력(신권)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호패법]]을 다시 복원하고, 《동국통감》, 《국조보감》 등을 만들기도 하였다. [[조선 성종|성종]](재위 1469~94년)은 개국 이후의 문물제도를 정비하였다. [[15세기]] 말부터 지방의 사림 세력이 정계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조선은 [[명나라|명]]에 대한 사대 관계에 있었다. 이는 원나라를 멸망시킨 명나라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한 외교였다. 조선은 명나라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제후국의 예를 취했다. [[1400년]] 이후 정식 국왕으로 책봉된 이후로도 명나라와의 친선을 위해 [[명나라|명]]나라에 형식적으로 관리를 파견하여 책봉 승인을 받았다. 명나라에 진하사, 문안사, 동지사 등을 파견했고 [[조선 태종|태종]] 때부터 [[조선 선조|선조]] 때까지는 종계변무사를 파견했다. 조선 개국 초에는 명을 침공하는 고려군의 총사령관이 이성계였고, 조선 건국 이후에도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강행하려 했던 문제로 [[명나라]]는 이성계를 [[조선의 역대 국왕|조선의 국왕]]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 국왕 책봉고명사신이 도착하면 이성계를 [[권지고려국사]] 혹은 [[권지고려국사|권지조선국사]]라고 불렀다. 조성의 왕을 [[조선의 역대 국왕|조선 국왕]]이라고 부른 것은 [[1401년]](태종 1년) [[조선 태종|태종]] 때였다.
 
또 다른 주변 국가인 [[일본]]과 [[여진족|여진]]에게는 교린 정책(交鄰政策)을 취했다. 조선은 건국 초기에 여진족의 거주지를 침공하여 조선의 영토를 확장하였다. 일부 여진족들은 조선과 사대 관계를 맺었다. 또한 조선은 왜구의 본거지인 일본의 [[대마도 정벌|대마도를 정벌]]하여 왜구의 침입을 종식시켰다. 한편으로 대마도주는 이후 조선의 신하이자 [[막부]]의 [[다이묘]]로 활동하여 이득을 취하였다. 사대 정책과 교린 정책은 조선의 기본적인 대외정책으로서 계속 계승되었다.
 
==== 제도의 정비와 문화 융성 ====
시대가 내려오면서 제도의 결함이 드러났다. 특히 토지제도의 문란으로, 훈구 재상의 대토지 소유는 토지분배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신진 사류의 불만을 사게 되어, 여러 번에 걸쳐 [[사화]]라는 참극을 빚어냈다.
 
처음에는 신진 사림세력들이 빈번히 화(사화)를 당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지방에 내려가 학문에만 열중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조선 선조|선조]] 때에는 이들을 등용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사림들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 이후 사림들 간 자기 일파(일당 전제화)만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대대로 대립하니, 이를 [[당쟁]]이라 한다. 이렇게 되자 처음에는 지방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 나중에는 모두 넓은 토지를 소유하여 지방 세력의 중심을 이루고 끈덕진지루한 당쟁의 기반으로 변질 되는 등 심한 폐단을 나타내었다.
 
이어 16세기~17세기에 주변국인 일본, 청과 치른 전쟁(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국토는 황폐해지고, 국가 재정은 고갈되었으며, 백성은 비참한 생활을 강요당했다. 이후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씻고자 청나라를 정벌하는 [[북벌론]]이 대두하였고 군대를 만들었으나 실천은 하지 못했다. 그 반대로 [[북학론]]도 있었다.
 
==== 경제 체제의 해이 ====
양반 관리들은 국가로부터 과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공신전·별사전(別賜田)을 받았는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 세습되었다. 양반 관리들은 또 매입(買入)·겸병(兼倂)·개간 등의 각종 방법으로 그들의 소유지를 확대했다. 특히 비옥한 삼남 지방의 넓은 공전(公田)을 침식하였다. 직전법조차 폐지되자 그들의 토지에 대한 욕구는 농장(農莊)의농장의 확대를 가져왔고, 토지를 잃고 유망(流亡)하는 농민의 증가는 점차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다.
 
한편 양반 관리들의 사치를 위한 지방 특산물과 수공업 제품의 공납(貢納)이나 진상 또한 농민들의 커다란 고통이었다. 방납까지 생겨 그 피해는 극심해졌다. 이런 폐단을 개혁하기 위하여 사림의 [[이이]](李珥)와 [[유성룡]]은 수미법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채용되지 않았다.
환곡 제도로 정부는 농민을 상대로 일종의 고리대를 하기도 했다. [[환곡]]은 원래 의창이 담당하는 일이었으나 의창이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자 상평창이 이를 맡게 되었다. 이리하여 원래 농민 진휼 정책(賑恤政策)에서 발단했던 환곡은 점차 변질되었다.
 
특수직에 종사하는 직역(職役) 외에 양인에게 부과되는 신역(身役)은 주로 군역이었다. 군역 또한 신역의 포납화(布納化) 경향을 촉진하여 제도가 붕괴되었다. 초기에 군역의 대가로 바치는 포(布)는 상당히 고가(高價)에고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수포 대역제(收布代役制)가 관행이 되면서 포납은 정남(丁男)에 대한 인두세(人頭稅)와 같이 되었으며, 평가도 절하되어 갔다. 그리하여 그 공정액이 당시 전세(田稅)의 약 3배에 해당하여 양인에게는 극히 과중한 부담이 되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겪으면서 원래의 신역은 붕괴되었다. 그 결과로 농민들의 생활은 지극히 불안정해졌다. 많은 농민이 유민(流民)이 되어 농촌은 황폐하여 갔으며, 각지에는 도적의 무리가 횡행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임꺽정이 대표적이다.
[[1592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는 20만 병력의 일본군을 조선에 대거 보내어 조선을 침략했다. 조선은 초반 [[제승방략]]체제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였고, 일본군의 [[백병전]] 능력과 신무기인 [[조총]]에 크게 고전하였다. [[부산진성]]의 [[정발 (1553년)|정발]]과 [[동래성]]의 [[송상현]]이 삽시간 만에 일본군에게 무너졌다. 그리고 상주의 [[이일]]과 충주 탄금대에서 진을 치고 있던 [[신립]]의 군대도 일본군이 무장한 조총에 의해 궤멸당한다. [[조선 선조|선조]]는 수도 한양을 버리고 압록강변에 있는 [[의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다. 일본군은 개전 20여 일 만에 [[한양]]에 입성하였고, 임진강 방어선도 간단히 뚫은 채 [[평양]]까지 손쉽게 점령하였다.
 
이 기세로 가면 [[의주]]도 점령될 것 같았으나,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옥포 해전|옥포]]·[[사천 해전|사천]]·[[한산도 대첩|한산도 해전]]에서 일본 [[해군|수군]]을 크게 격파해버림으로써, 일본군은 수군을 통한 보급작전에 큰 지장을 받게 되었고 더 이상 북진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일본군은 삼남 지역에서도 조선 각지의 [[의병]]과 관군의 반격을 받았고, 명나라에서도 [[이여송]]이 지휘하는 대군을 파병하였다. [[조선군]]은 [[명나라]]의 지원군에 힘입어 일본군을 몰아내어 그 세력을 [[경상도]] 해안 일대로 후퇴시켰다.
 
그러나 5년 간의 지리멸렬(支離滅裂)한 휴전협상이 실패하자,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였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사]](병으로 죽음)로 일본군에게 철수 명령이 떨어졌고, [[노량 대첩]]을 끝으로 7년의 [[임진왜란]]도 막을 내렸고, 이때 [[노량 대첩]]에서 [[이순신]]도 일본군 장수에 의해 왼쪽 가슴 흉부에 총을 맞고 전사하였다.
 
==== 전후 복구 사업 ====
 
==== 병자호란 ====
사림파의 지지를 받고 즉위한 [[조선 인조|인조]]는 다시 명나라와의 친선 정책을 펼쳤고, 이에 자극받은 [[청나라]](후금, 여진족)는 [[1627년]]([[정묘호란]])과 [[1636년]]([[병자호란]]) 두 번에 걸쳐 조선에 침입하였다. 조선은 이 전쟁에서 패하여 청나라에국왕 치욕스럽고인조가 굴욕적인청의 [[삼배구고두례]]라는 세 번 절하고 이마를 삼전도 앞 얼음(지금의황제 [[서울특별시숭덕제|홍타이지]]에게 [[송파구삼배구고두례]] 위치해 있는 롯데월드 앞 석촌호수)에서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내리치는 만주족 식의 항복을 하고행하고, 소현세자를 비롯한 봉림대군(훗날의 효종)과 왕자들, 백성들까지백성들이 볼모로 끌려감으로써 조선은 청나라를 상국으로끌려갔다. 모시게병자호란으로 되는청과 군신관계를조선간의 맺게군신관계가 되었다확립되었다.
 
한편 조선사회 자체의 모순과 분열 대립에, 임진왜란과 호란(정묘·병자)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국가 재정은 고갈되었으며, 백성들은 비참한 생활을 강요당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 북벌론과 북학론의 대두 ====
[[병자호란]]이 종식되어 청나라와 군신(君臣) 관계를 맺게 된 조선은 겉으로는 청나라에 사대하였으나, 실제로는 은밀하게 국방 강화에 힘을 기울이면서 청나라에 복수할 생각으로 북벌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선 효종|효종]]은 [[송시열]], [[이완]] 등 주전파를 중용하여 군대를 대량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북벌을[[북벌론|북벌]]을 준비했다. 그렇게 하여 45,000명의 군사력이 확립되었다. 이러한 북벌론(北伐論)은북벌론은 [[1659년]] 출병 직전 효종이 사망하자 사실상 일단락되었다.
 
현종과 숙종은 서인(산림, 山林)을 잠시 배척하기도 했으나 결국 남인을 몰아내고 서인과 정치를 하였다. 또한, 서인을 중심으로 청나라의 정세 변화를 살펴봐서 북벌 움직임이 다시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효종 때와는 달리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 북벌은 어렵다는 판단하에 계속 보류되어 결국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순조 때에 정권을 잡았던 안동 김씨 세력은 헌종이 즉위하면서 풍양 조씨 집안에게 잠시 권력을 내주었으나 철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정권을 잡아 세도를 떨쳤다. 60년간 이어진 세도정치의 영향으로 왕권은 한없이 나약해져서 백성은 물론 왕족들마저도 안동 김씨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기형적인 정치 형태인 세도정치는 온갖 부정부패를 야기했는데 전정(田政) · 군정(軍政) · 환곡(還穀) 등 이른바 [[삼정의 문란|삼정(三政)의 문란]]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외척들의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계속되자 이에 대항하는 민란이 여러 차례 일어났는데 이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순조 때의 [[홍경래의 난]](1812년), 철종 때의 [[진주민란]](1862년) 등이다. 몰락한 [[양반]]인 [[홍경래]]의 지도 하에 수많은 몰락한 농민들과 영세농들이 참가했다. 이들은 한때 [[청천강]]에서 [[의주]]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장악했으나 4개월 만에 관군에 의해 평정되었다. 홍경래의 난 이후에도 민란은 계속 이어져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그럼에도 세도 정권의 탐학과 횡포는 날로 심해져 갔고 재난과 질병이 거듭되었다. 특히,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져 백성의 생활은 그만큼 더 어려워져 갔다. [[1820년]]의 전국적인 수해와 이듬해 [[콜레라]](조선에서는 괴질이라고 불림)의 만연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비참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피해는 그 뒤 수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이에 따라 굶주려 떠도는 백성이 거리를 메울 정도였다. 이와 전후하여 천주교(天主敎)가천주교가 전래하였으나 박해를 당하였다.
 
==== 흥선대원군의 섭정기 ====
이에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이 팽배해졌고, 정치·사회에 대한 의식이 급성장한 농촌 지식인과 농민들 사이에 사회 변화의 욕구가 한층 더 높아졌다.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한 [[동학]]은 당시 농민들의 변혁 요구에 맞는 것이었고, 농민들은 동학의 조직을 통하여 대규모의 세력을 모을 수 있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에서 봉기한 동학 농민군은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폭구민(除暴救民)'''을 내세우고 [[전라도]] 일대를 공략한 다음 전주를 점령하였다(1894). 농민군은 조정에 폐정 개혁 12개조를 건의하고, 산발적으로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며 개혁을 실천해나갔다. 그러나 조정의 개혁이 부진하고 일본의 침략과 내정 간섭이 강화되자 농민군은 외세를 몰아낼 목적으로 다시 봉기하여 서울로 북상하였다. 먼저 [[공주시|공주]]를 점령하려 한 농민군은 우금치에서 근대 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의 협공으로 패하고 지도부([[전봉준]])가 체포되면서 동학 농민 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ref> 국사 편찬 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서울 2004. 335쪽. </ref>
 
한편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였다는 명분으로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고(청-일간에 맺어진 '''시모노세키 조약'''에 동시에 파병가능이라고 적혀져 있음), 급기야 서로 무력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청일전쟁]]). 그 와중에 일본은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협박하여 친일적인 성향을 띤 개혁을 이루게 되는데, 이른바 [[갑오개혁]]이다.
 
====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의 삼국간섭을 받은 일본은 요동 반도를 잃었고, 남하하는 러시아는 조선에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흥선대원군]]을 옹립하여 조선에 친일 정권을 세우고자 일본군 수비대와 대륙낭인 등을 집합시켜 몰래 경복궁에 침입시킨 후 친러시아파인 [[명성황후]]를 살해하였다(→[[을미사변]]). 1895년 음력 8월에 일본의 강요에 따라 김홍집을 내각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친일 내각이 구성이 된다. 이때 김홍집 내각의 개혁 정책 중 하나인 단발령은 전국에 있는 유생과 백성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 명성황후 살해 사건 [[을미사변]]은 미국인과 러시아인에게 목격되어 국제적인 문제가 되었다. 국제 사회의 비난 여론을 받고 일본 외무성은 명성황후 살해의 주동자인 미우라 공사 등을 소환하여 재판과 군법회의에 회부하였지만 일본 나가사키 고등법원은 증거 불충분을 판시하며 전원 무죄를 선고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반일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는고조되어 을미의병이 일어났으며,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선비들의 주도 아래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여 친일파와 일본의일본 상인 및 어인 등을민간인들을 공격하고 일본군 수비대와 각지에서 교전하였다. [[을미의병]]은 유인석, 김복한, 기우만, 이강년 등이 주도하였다. 일본군이 의병 토벌로 한양을 비우게 되자 고종은 1896년 2월 11일에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고종은 [[1897년]]에 [[덕수궁]]으로 환궁하고 몇달 후 [[대한제국]]을 선포함으로써 국호로서의 조선은 더이상 쓰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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