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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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권좌에 오른 [[조선 현종|현종]]은 [[경신대기근]]에도 불구하고 전쟁으로 고갈된 재정을 수습하고 황폐화된 조선을 복구하며 서인을 견제하는 데 힘을 썼다. 이즈음 붕당이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환국'을 [[조선 숙종|숙종]]이 빈번하게 일으키면서, 붕당정치는 견제와 균형을 통한 상호 공존 및 부패 방지라는 원칙은 퇴색되고 정권을 잡을 때마다 다른 붕당을 모조리 축출하는 일당 전제화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숙종이 총애하던 [[장희빈]]의 소생 [[조선 경종|경종]]은 [[소론]]과 [[노론]]의 알력다툼에 지쳐 재위 4년 만에 승하했다.
흥선군은 [[흥선대원군]]이 되어 고종을 배후에서 조종하였다. 그는 붕당의 근원인 서원을 철폐하고 외척 가문인 안동 김씨 세력들을 축출하는 등
민비는 민씨 일가를 국가 요직에 대거 임명하여 조정을
== 국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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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년 고려의 무신이었던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계기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창왕·공양왕 등을 왕위에 올렸다가 폐위시키는 등 정권·군권을 장악하고 전제 개혁을 단행하여 경제적인 실권까지 장악했다. 이어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으로 인하여 정몽주가 제거되고 1392년 7월 이성계는 공양왕의 왕위를 물려받아 새 왕조를 개국하여 [[조선 태조|태조]](재위 1392년 ~ 1398년)가 되었다.<ref>[[#태조실록 1413|태조실록 (1413)]]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107017_001 1권, 태조 1년 7월 17일 병신 1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s:태조강헌대왕실록/1년|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1년]]〉7월 17일, 태조가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였다.</ref>
1393년에는 국명을 [[명나라|명]]으로부터 선택받아 조선으로 고치고<ref>[[#태조실록 1413|태조실록 (1413)]]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202015_001 3권, 태조 2년 2월 15일 경인 1번째기사]</ref> 1394년에는 [[개경]]의 민심이 안 좋아 한양으로 천도하여<ref>[[#태조실록 1413|태조실록 (1413)]]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310025_001 6권, 태조 3년 10월 25일 신묘 1번째기사]</ref> 여러 개혁을 단행했다. [[조선 태조|태조]]는 재위기간 동안 [[개국공신]]에게 권력을 거의 다 주어 특별히 한 업적은 없었다. 그러던 중 개국공신들이 권력을 휘두르는
[[세종대왕]](재위 1418~1450년)은 학문 · 군사 · 과학 · 문화 등 모든 면에서 큰 업적을 이룩하였고 정치는 안정되어갔다. [[조선 세조|세조]](재위 1455~68년)는 [[조선 태종|태종]]처럼 신하의 권력(신권)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호패법]]을 다시 복원하고, 《동국통감》, 《국조보감》 등을 만들기도 하였다. [[조선 성종|성종]](재위 1469~94년)은 개국 이후의 문물제도를 정비하였다. [[15세기]] 말부터 지방의 사림 세력이 정계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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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명나라|명]]에 대한 사대 관계에 있었다. 이는 원나라를 멸망시킨 명나라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한 외교였다. 조선은 명나라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제후국의 예를 취했다. [[1400년]] 이후 정식 국왕으로 책봉된 이후로도 명나라와의 친선을 위해 [[명나라|명]]나라에 형식적으로 관리를 파견하여 책봉 승인을 받았다. 명나라에 진하사, 문안사, 동지사 등을 파견했고 [[조선 태종|태종]] 때부터 [[조선 선조|선조]] 때까지는 종계변무사를 파견했다. 조선 개국 초에는 명을 침공하는 고려군의 총사령관이 이성계였고, 조선 건국 이후에도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강행하려 했던 문제로 [[명나라]]는 이성계를 [[조선의 역대 국왕|조선의 국왕]]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 국왕 책봉고명사신이 도착하면 이성계를 [[권지고려국사]] 혹은 [[권지고려국사|권지조선국사]]라고 불렀다. 조성의 왕을 [[조선의 역대 국왕|조선 국왕]]이라고 부른 것은 [[1401년]](태종 1년) [[조선 태종|태종]] 때였다.
또 다른 주변 국가인 [[일본]]과 [[여진족|여진]]에게는 교린 정책(交鄰政策)을 취했다. 조선은 건국 초기에 여진족의 거주지를 침공하여 조선의 영토를 확장하였다. 일부 여진족들은 조선과 사대 관계를 맺었다. 또한 조선은 왜구의 본거지인 일본의 [[대마도 정벌|대마도를 정벌]]하여 왜구의 침입을 종식시켰다.
==== 제도의 정비와 문화 융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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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내려오면서 제도의 결함이 드러났다. 특히 토지제도의 문란으로, 훈구 재상의 대토지 소유는 토지분배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신진 사류의 불만을 사게 되어, 여러 번에 걸쳐 [[사화]]라는 참극을 빚어냈다.
처음에는 신진 사림세력들이 빈번히 화(사화)를 당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지방에 내려가 학문에만 열중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조선 선조|선조]] 때에는 이들을 등용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사림들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 이후 사림들 간 자기 일파(일당 전제화)만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대대로 대립하니, 이를 [[당쟁]]이라 한다. 이렇게 되자 처음에는 지방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 나중에는 모두 넓은 토지를 소유하여 지방 세력의 중심을 이루고
이어 16세기~17세기에 주변국인 일본, 청과 치른 전쟁(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국토는 황폐해지고, 국가 재정은 고갈되었으며, 백성은 비참한 생활을 강요당했다. 이후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씻고자 청나라를 정벌하는 [[북벌론]]이 대두하였고 군대를 만들었으나 실천은 하지 못했다. 그 반대로 [[북학론]]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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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 체제의 해이 ====
양반 관리들은 국가로부터 과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공신전·별사전(別賜田)을 받았는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 세습되었다. 양반 관리들은 또 매입(買入)·겸병(兼倂)·개간 등의 각종 방법으로 그들의 소유지를 확대했다. 특히 비옥한 삼남 지방의 넓은 공전(公田)을 침식하였다. 직전법조차 폐지되자 그들의 토지에 대한 욕구는
한편 양반 관리들의 사치를 위한 지방 특산물과 수공업 제품의 공납(貢納)이나 진상 또한 농민들의 커다란 고통이었다. 방납까지 생겨 그 피해는 극심해졌다. 이런 폐단을 개혁하기 위하여 사림의 [[이이]](李珥)와 [[유성룡]]은 수미법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채용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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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곡 제도로 정부는 농민을 상대로 일종의 고리대를 하기도 했다. [[환곡]]은 원래 의창이 담당하는 일이었으나 의창이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자 상평창이 이를 맡게 되었다. 이리하여 원래 농민 진휼 정책(賑恤政策)에서 발단했던 환곡은 점차 변질되었다.
특수직에 종사하는 직역(職役) 외에 양인에게 부과되는 신역(身役)은 주로 군역이었다. 군역 또한 신역의 포납화(布納化) 경향을 촉진하여 제도가 붕괴되었다. 초기에 군역의 대가로 바치는 포(布)는 상당히
이와 같은 과정을 겪으면서 원래의 신역은 붕괴되었다. 그 결과로 농민들의 생활은 지극히 불안정해졌다. 많은 농민이 유민(流民)이 되어 농촌은 황폐하여 갔으며, 각지에는 도적의 무리가 횡행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임꺽정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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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는 20만 병력의 일본군을 조선에 대거 보내어 조선을 침략했다. 조선은 초반 [[제승방략]]체제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였고, 일본군의 [[백병전]] 능력과 신무기인 [[조총]]에 크게 고전하였다. [[부산진성]]의 [[정발 (1553년)|정발]]과 [[동래성]]의 [[송상현]]이 삽시간 만에 일본군에게 무너졌다. 그리고 상주의 [[이일]]과 충주 탄금대에서 진을 치고 있던 [[신립]]의 군대도 일본군이 무장한 조총에 의해 궤멸당한다. [[조선 선조|선조]]는 수도 한양을 버리고 압록강변에 있는 [[의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다. 일본군은 개전 20여 일 만에 [[한양]]에 입성하였고, 임진강 방어선도 간단히 뚫은 채 [[평양]]까지 손쉽게 점령하였다.
이 기세로 가면 [[의주]]도 점령될 것 같았으나,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옥포 해전|옥포]]·[[사천 해전|사천]]·[[한산도 대첩|한산도 해전]]에서 일본 [[해군|수군]]을 크게 격파해버림으로써, 일본군은 수군을 통한 보급작전에 큰 지장을 받게 되었고 더 이상 북진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일본군은 삼남 지역에서도 조선 각지의 [[의병]]과 관군의 반격을 받았고, 명나라에서도 [[이여송]]이 지휘하는 대군을 파병하였다. [[조선군]]은 [[명나라]]의 지원군에 힘입어 일본군을 몰아내어 그 세력을 [[경상도]] 해안 일대로 후퇴시켰다.
그러나 5년 간의 지리멸렬(支離滅裂)한 휴전협상이 실패하자,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였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사]](병으로 죽음)로 일본군에게 철수 명령이 떨어졌고, [[노량 대첩]]을 끝으로 7년의 [[임진왜란]]도 막을 내렸고,
==== 전후 복구 사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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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자호란 ====
사림파의 지지를 받고 즉위한 [[조선 인조|인조]]는 다시 명나라와의 친선 정책을 펼쳤고, 이에 자극받은 [[청나라]](후금, 여진족)는 [[1627년]]([[정묘호란]])과 [[1636년]]([[병자호란]]) 두 번에 걸쳐 조선에 침입하였다. 조선은 이 전쟁에서 패하여
한편 조선사회 자체의 모순과 분열 대립에, 임진왜란과 호란(정묘·병자)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국가 재정은 고갈되었으며, 백성들은 비참한 생활을 강요당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 북벌론과 북학론의 대두 ====
[[병자호란]]이 종식되어 청나라와 군신(君臣) 관계를 맺게 된 조선은 겉으로는 청나라에 사대하였으나, 실제로는 은밀하게 국방 강화에 힘을 기울이면서 청나라에 복수할 생각으로 북벌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선 효종|효종]]은 [[송시열]], [[이완]] 등 주전파를 중용하여 군대를
현종과 숙종은 서인(산림, 山林)을 잠시 배척하기도 했으나 결국 남인을 몰아내고 서인과 정치를 하였다. 또한, 서인을 중심으로 청나라의 정세 변화를 살펴봐서 북벌 움직임이 다시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효종 때와는 달리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 북벌은 어렵다는 판단하에 계속 보류되어 결국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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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때에 정권을 잡았던 안동 김씨 세력은 헌종이 즉위하면서 풍양 조씨 집안에게 잠시 권력을 내주었으나 철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정권을 잡아 세도를 떨쳤다. 60년간 이어진 세도정치의 영향으로 왕권은 한없이 나약해져서 백성은 물론 왕족들마저도 안동 김씨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기형적인 정치 형태인 세도정치는 온갖 부정부패를 야기했는데 전정(田政) · 군정(軍政) · 환곡(還穀) 등 이른바 [[삼정의 문란|삼정(三政)의 문란]]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외척들의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계속되자 이에 대항하는 민란이 여러 차례 일어났는데 이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순조 때의 [[홍경래의 난]](1812년), 철종 때의 [[진주민란]](1862년) 등이다. 몰락한 [[양반]]인 [[홍경래]]의 지도 하에 수많은 몰락한 농민들과 영세농들이 참가했다. 이들은 한때 [[청천강]]에서 [[의주]]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장악했으나 4개월 만에 관군에 의해 평정되었다. 홍경래의 난 이후에도 민란은 계속 이어져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그럼에도 세도 정권의 탐학과 횡포는 날로 심해져 갔고 재난과 질병이 거듭되었다. 특히,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져 백성의 생활은 그만큼 더 어려워져 갔다. [[1820년]]의 전국적인 수해와 이듬해 [[콜레라]](조선에서는 괴질이라고 불림)의 만연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비참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피해는 그 뒤 수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이에 따라 굶주려 떠도는 백성이 거리를 메울 정도였다. 이와 전후하여
==== 흥선대원군의 섭정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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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이 팽배해졌고, 정치·사회에 대한 의식이 급성장한 농촌 지식인과 농민들 사이에 사회 변화의 욕구가 한층 더 높아졌다.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한 [[동학]]은 당시 농민들의 변혁 요구에 맞는 것이었고, 농민들은 동학의 조직을 통하여 대규모의 세력을 모을 수 있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에서 봉기한 동학 농민군은
한편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였다는 명분으로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고
====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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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독일, 프랑스의 삼국간섭을 받은 일본은 요동 반도를 잃었고, 남하하는 러시아는 조선에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흥선대원군]]을 옹립하여 조선에 친일 정권을 세우고자 일본군 수비대와 대륙낭인 등을 집합시켜 몰래 경복궁에 침입시킨 후 친러시아파인 [[명성황후]]를 살해하였다(→[[을미사변]]). 1895년 음력 8월에 일본의 강요에 따라 김홍집을 내각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친일 내각이 구성이 된다. 이때 김홍집 내각의 개혁 정책 중 하나인 단발령은 전국에 있는 유생과 백성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 명성황후 살해 사건 [[을미사변]]은 미국인과 러시아인에게 목격되어 국제적인 문제가 되었다. 국제 사회의 비난 여론을 받고 일본 외무성은 명성황후 살해의 주동자인 미우라 공사 등을 소환하여 재판과 군법회의에 회부하였지만 일본 나가사키 고등법원은 증거 불충분을 판시하며 전원 무죄를 선고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반일 감정이 극도로
== 정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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