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술환국으로 정권을 교체한 [[조선 숙종|숙종]]은 4월 2일<ref>《숙종실록》에는 음력 4월 1일 기사로 기록되어 있고, 《승정원일기》에는 4월 2일 기사로 기록되어 있다.</ref>, 폐인(廢人: [[인현왕후]])을 언급하는 자와 왕세자의 신위에 위협이 되는 발언을 하는 자는 무조건 대역죄를 묻겠다고 선포하여 왕비를 교체할 마음이 없음을 확고히 피력했다.
{{인용문|“거센 신하의 흉악한 잔당으로서 국본(國本: 왕세자)을 동요하는 일이 있는 자와, 폐인(廢人)【중궁(中宮)을 가리킨다.】·홍치상(弘致祥)<ref group="주">[[조선 숙종|숙종]]의숙종의 고종형으로 [[숙안공주]]의 아들이자 [[조선 숙종|숙종]]의숙종의 후궁 [[영빈 김씨]]의 이모부이다. [[기사환국]] 후, [[이사명]]과 함께 [[동평군]]을 시역죄로 무고하려고 했었던 사실이 발각되어 체포됐다가 [[심권]]과 [[이징명]] 등의 증언으로 인해 1687년 처질녀인 [[영빈 김씨]]와김씨와 함께 [[조사석]]과 [[희빈 장씨]]의 모친에 대한 거짓 추문을 만들어 퍼트린 장본인이란 사실이 드러나 결국 [[영빈 김씨]]는김씨는 폐서인이 되었고 [[홍치상]]은 다른 여죄(무고 3차례)와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홍치상]]의홍치상의 아들인 [[홍태유]]가 아비를 구명하기 위해 죄를 전가하려고 했던 [[심정보]]([[숙명공주]]의 아들, [[영빈 김씨]]의김씨의 다른 이모부)는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유배되었다가 1692년 병에 걸린 [[숙명공주]]의 요청으로 특별히 방면되었다.</ref>·이사명(李師命)<ref group="주">노론4대신인 [[이이명]]([[김만중]]의 사위)의 형이자 [[이건명 (조선)|이건명]]의 사촌형으로, [[경신환국]] 때 [[김석주]]·[[민정중]]·[[김만중]]과 함께 [[남인]]에 대한 강경 처벌을 주도하였으며, 이 과정 중에 간계를 서슴치 않았기에 [[남인]]의 원한을 받았다. [[기사환국]] 후 [[오시수]]를 무고 살해한 죄목으로 체포되어 국문되다가, 숙종9년에 전쟁 발발을 언급한 거짓 왜서와 조작된 증언으로 [[남인]] 척살 및 병권 장악을 꾀하였던 것이 드러나고 인척인 [[홍치상]]과 함께 종실 [[동평군]]을 시역죄로 무고하려 했던 사실이 추가로 발각되었다. 뒤이어 사돈인 [[김만중]]이김만중이 1687년 대내에서 [[조선 숙종|숙종]]을숙종을 조롱했던 [[조사석]]의조사석의 추문이 [[홍치상]]에 의해 만들어져 이사명이 [[김만중]]에게김만중에게 전달한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처참되었다.</ref> 등을 위하여 신구(伸救)하는 자는 역률(逆律)로 논할 것이고, 이상(李翔)<ref group="주">[[인현왕후]]의 언니의 시숙이자 [[인현왕후]]의인현왕후의 외사촌오빠인 [[송병문]]([[송준길]]의 손자)의 장인이고 [[김제겸]]([[김수항]]의 손자. [[김창집]]의 아들)의 처조부이다. 숙종실록보궐정오에 수록된 "민진후(閔鎭厚)가 그(李翔)의 인척(姻戚)이란 이유로 사정(私情)에 끌려서 금령(禁令)도 마음에 두지 않고 곧바로 신설(伸雪)을 청하였으므로, 공의(公議)가 놀라와하였다." 문구는 이들의 관계가 특별했음을 드러낸다.</ref>을 위하여 신구하는 자는 중률(重律)로 결단할 것이다. 이 뜻을 중외(中外)에 명백히 포고하라.”|《조선왕조실록》 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일(무진) 5번째기사 }}
또한, 갑술환국이 발발한 4월 1일, [[남인]]이 대거 엄형을 받고 출척되는 상황에 [[민암]]과 오랜 친분이 있어온 [[장희재 (조선)|장희재]]가 스스로 죄를 청하였으나 [[조선 숙종|숙종]]은숙종은 편안한 마음으로 정사에 임하라며 위로하였다.<ref>《승정원일기》 숙종 20년 4월 1일 (무진) 원본356책/탈초본18책 (6/10)</ref>
그러나 4월 11일, [[조선 숙종|숙종]]이숙종이 돌연 [[장희재 (조선)|장희재]]에게장희재에게 직권남용의 죄<ref group="주">국청죄인 [[이시도]]가 유배형을 받고 밤중에 [[장희재 (조선)|장희재]]의장희재의 집에 종복 4명을 동행하고 찾아가 칼을 들고 [[장희재 (조선)|장희재]]의장희재의 암살을 꾀하였지만 실패하였고, [[장희재 (조선)|장희재]]는장희재는 이를 관청에 알리지 않고 [[이시도]]를이시도를 포청으로 보내 형벌을 써서 배후를 묻게한 후 조용히 방면해주었다. 풀려난 [[이시도]]는이시도는 즉시 [[사헌부]]로 출두하여 유배를 떠나기 전에 인사를 하려고 [[장희재 (조선)|장희재]]의장희재의 사가에 들렀는데 [[장희재 (조선)|장희재]]가장희재가 위로하며 송별주를 대접하기에 얻어마시다가 별안간 [[장희재 (조선)|장희재]]에게장희재에게 가슴을 얻어맞고, 죄없이 끌려가 형장을 맞은 탓에 발가락이 부러졌음을 고발했다. 이를 조사한 후 승정원이 [[조선 숙종|숙종]]에게숙종에게 사건을 보고하여 [[이시도]]는이시도는 유배를 떠나야 할 죄인이 포도대장의 집에 장정을 데리고 가 암살을 꾀한 죄로 다시 해부에 체포되어 엄히 국문케 하였으며, [[장희재장희재는 (조선)|장희재]]는 [[이시도]]의이시도의 범행을 국가에 고발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풀어준 것과 사사로이 형벌을 가한 죄로 임시면직의 처분을 받았다가 4월 8일 장령 유집일의 주장으로 포도대장직에서 파직되었다. 4월 11일, [[조선 숙종|숙종]]이숙종이 돌연 [[이시도]]의이시도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며 유배를 가야 할 [[이시도]]에게이시도에게 형장을 쓴 죄를 물어 [[장희재 (조선)|장희재]]에게장희재에게 유배형을 내리고 [[의금부]]로 긴급 압송했다.</ref>를 물어 삭탈관직하고 체포함<ref>《조선왕조실록》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1일(무인) 8번째기사 </ref>과 동시에 폐비 민씨([[인현왕후]])의 서궁(西宮)<ref group="주">[[조선 선조|선조]]의 계비 [[인목왕후]]가 유폐되었던 경운궁(慶運宮: 현 덕수궁)이다. [[인현왕후]]가 폐서인이 된 후 [[권대운]]을 비롯한 [[남인]]과 [[소론]]이 한때 국모였던 이를 여염에 두는 것은 왕실의 체모를 깎는 것이라 하여 폐황후를 별궁에서 여생을 보내도록 선처했던 [[송 인종]]의 고사대로 별궁에 두고 의식(衣食)을 궁에서 책임지도록 하여야 한다고 수차례 상소하였으나 [[조선 숙종|숙종]]의숙종의 완강한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갑술환국이 발생하고 열흘 째인 1694년 4월 9일, [[조선 숙종|숙종]]은숙종은 돌연 [[송 인종]]의인종의 고사를 들어 폐비 민씨를 서궁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을 허가하고 수직 한 명을 붙여주었다.</ref> 입처(=이사)를 길일을 고르지 말고 당장 다음날 옮기도록 할 것과 즉시 폐비 민씨의 사제에 여러 수직(=호위)을 붙이도록 하였는데<ref>《조선왕조실록》 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1일(무인) 3번째기사</ref>, 이는 이 날에 이르러 [[조선 숙종|숙종]]이숙종이 그녀를 복위하기로 결심했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다음날인 4월 12일, [[조선 숙종|숙종]]은숙종은 폐비 민씨([[인현왕후]])를 왕비로 복위하고, 동시에 국모가 둘일 수 없다는 조선의 국법을 들어 왕비 장씨([[희빈 장씨]])에게 옛 작호로 강봉하라 명한다.<ref>《조선왕조실록》 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2일(기묘) 6번째기사 </ref> 이 사건의 내부 사정에 대해 [[민진원]]은 그의 개인저서인 [[단암만록]]에 [[숙빈 최씨]]가 한밤 중에 [[조선 숙종|숙종]]의숙종의 처소로 나아가 [[장희재 (조선)|장희재]]가 자신을 독살하려 했던 것이 사실이라며 눈물로 호소한 것이 성공하였다고 기록했다.<ref group="주">[[장희재장희재가 (조선)|장희재]]가 [[숙빈 최씨]]의최씨의 외사촌 형부인 해성에게 돈 50냥을 주고 [[숙빈 최씨]]의최씨의 외숙모 봉영을 입궁시켜 [[숙빈 최씨]](당시 숙원)에게 독이 든 음식을 먹게 하여 독살토록 사주했다는 김인의 고변과 [[숙빈 최씨]]의최씨의 증언은 윤5월 2일 [[소론]] 측의 강경한 주장으로 압송된 [[숙빈 최씨]]의최씨의 외숙모 일가의 심문 결과, 봉영이 최씨의 출산 당시 입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과 궁에는 허가되지 않은 외부 음식을 들일 수 없어 고변대로의 실행이 불가능했다는 것이 밝혀지고 회임 중인 왕의 유일한 후궁을 독살하기 위해 후궁에게 빌붙어 생계를 연명하던 유일한 친지에게 주었다는 단돈 50냥은 인정(人情)은 접어두고 시세와 비교해도 도저히 계산이 맞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지적으로 모두 허위임이 밝혀졌다.</ref>
[[인현왕후]]의 복위와 [[희빈 장씨]]의 강봉에 대해 갑술환국을 계기로 투합했던 [[노론]]과 [[소론]]이 강경히 대립하게 되는데, 이는 [[노론]]은노론은 [[인현왕후]]의인현왕후의 복위를 목적했고, [[소론]]은소론은 [[희빈 장씨]]를장씨를 왕비로 둔 채 [[인현왕후]]를인현왕후를 폐서인인 상태로 별궁에 모셔 편안한 여생을 맞기만을 목적했던 탓이다.
{{인용문|‘노당은 폐비를 복위시키려 하고, 소당은 폐비를 별궁(別宮)에 옮기려 한다.’ — 《조선왕조실록》 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일(무진) 2번째기사}}
[[조선 숙종|숙종]]의 복위 명령에 병조판서 [[서문중]]은 이조참판 [[박태상]] 등과 함께 사람을 모아 ‘9년·6년과, 아들이 있고 아들이 없는 것은 어느 것이 중하고 어느 것이 경한가?’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인현왕후]]가 비록 [[희빈 장씨]]보다 더 오래 왕비로 있었으나 왕세자의 생모인 [[희빈 장씨]]가장씨가 더 귀하다는 뜻이다. 정원(政院)은 조정백관과 신중히 공론을 한 후에 결정지어질 때까지 명을 받들 수 없다는 거부의사를 표명했다.<ref>《조선왕조실록》 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3일(경진) 2번째기사 </ref> [[인현왕후]]의 복위가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노론]]과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소론]]의 격렬한 언쟁이 오가던 가운데<ref>《숙종실록》에는 누락된 내용으로 《승정원일기》 4월 12일 ~ 4월 16일까지의 기사에 수록되어 있다.</ref> 4월 16일에 이르러 우의정 [[윤지완]], 공조판서 [[신익상]], 한성부우윤 [[임상원]], 병조참의 [[이유]] 등의 [[소론]]의소론의 대표 인물들이 단체로 사직상소를 올리기에 이르렀는데<ref>《승정원일기》 숙종 20년 4월 16일 (계미) 원본356책/탈초본18책</ref> [[조선 숙종|숙종]]이숙종이 갑술환국을 일으키며 중앙을 [[소론]] 중심으로 채웠던 만큼 사태가 심각했다. 이 사건은 엿새 후인 4월 17일, 영의정이자 소론 영수였던 [[남구만]]이 '이미 왕명은 내려졌고, 자식이 어미(國母)의 죄를 논하며 도로 쫓아내라 마라 의논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고 [[소론]]을소론을 중재하여 결국 [[인현왕후]]가인현왕후가 왕비로 복위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으나, [[남구만]]이 [[인현왕후]]의인현왕후의 복위는 기쁘고 [[희빈 장씨]]의 강호는 슬프다고 한 표현이 [[노론]]의노론의 비위를 거스렀고거슬렀고<ref>《조선왕조실록》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7일(갑신) 1번째기사 </ref>, 이후 [[인현왕후]]의 복위를 강력히 반대했던 [[소론]] 대신들을 보호하고 [[노론]]이노론이 [[장희재 (조선)|장희재]]를 제거하는데제거하는 데 번번히 방해를 한 탓에 [[남구만]] 역시 [[노론]]의노론의 당적으로 규정되고 만다.<ref group="주">[[남구만]]은남구만은 [[인현왕후]]의인현왕후의 인척으로, [[인현왕후]]의인현왕후의 사촌올케 남씨([[민정중]]의 맏며느리. [[민진장]]의 처)가 [[남구만]]의남구만의 사촌누이이다.</ref>
6월 1일, [[인현왕후]]는 새로이 즉위식을 하여 왕비로 복위할 수 있었으나<ref>《조선왕조실록》숙종 27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6월 1일(정유) 3번째기사 </ref>, [[소론]]의 창시자인 [[윤증]]은 옛 왕조의 좌우황후(左右皇后)의 예를 받들어 [[인현왕후]]와인현왕후와 [[희빈 장씨]]를 동등히 높이고 호칭하였고<ref>《조선왕조실록》숙종 27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10월 3일(정유) 5번째기사 </ref>, 우의정 [[윤지완]]은 [[인현왕후]]와인현왕후와 한 식구임에도 불구하고<ref group="주">[[윤지완]]은윤지완은 [[민진원]]의 장인 [[윤지선]]의 아우로, [[인현왕후]]의인현왕후의 둘째 올케의 숙부이다.</ref>사직서를 들고 [[조선 숙종|숙종]]과숙종과 면담하여 [[희빈 장씨]]에게장씨에게 왕후에 준하는 작위를 만들어 그녀의 지위에 합당한 예우를 올려줄 것을 청하고 수년이 넘도록 [[인현왕후]]에게인현왕후에게 왕후의 예를 올리지 않았으며<ref>《조선왕조실록》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윤5월 27일(계사) 2번째기사 </ref><ref>《조선왕조실록》숙종 28권, 21년(1695 을해 / 청 강희(康熙) 34년) 3월 30일(신묘) 3번째기사</ref> [[서문중]] [[박만정]] 등 [[소론]]이소론이 연이어 [[희빈 장씨]]에게장씨에게 왕후에 준하는 새로운 작위를 만들어 올릴 것을 상소하고, 공사(公事) 중에도 [[소론]]은소론은 [[희빈 장씨]]에게장씨에게 감히 후궁의 작호로 호칭할 수 없다 하여 모처(某處)라고 돌려 호칭하니<ref>《조선왕조실록》숙종 29권, 21년(1695 을해 / 청 강희(康熙) 34년) 8월 3일(임진) 1번째기사</ref>, 이러한 사정은 1701년 [[인현왕후]]가인현왕후가 2년간의 투병 끝에 사망하여 [[희빈 장씨]]의장씨의 복위가 불가피해진 상황 속에 [[숙빈 최씨]]의 발고로 터진 [[무고의 옥]]의 배경이 되었으며, [[무고의 옥]]은옥은 [[인현왕후]]의인현왕후의 당파인 [[노론]]이노론이 일시적으로 정권을 독점케하여 1699년을 시점으로 탕평책을 주장하던 [[소론]] [[최석항]] 등의 중재 아래 극소수 조정에 복귀했던 [[남인]]이 [[기사환국]] 당시 [[희빈 장씨]]와장씨와 간계를 꾸며 [[인현왕후]]를인현왕후를 폐비시킨 역당으로 변모되어 다시 출척되고 [[조선 정조|정조]]가 즉위하기까지 정계에서 사라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고<ref group="주">[[조선 영조|영조]] 말년에 [[남인]]도남인도 관직을 받았으나 [[조선 정조|정조]]가정조가 즉위하였을 당시 5품 이상의 [[남인]]은남인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던 만큼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다.</ref>, [[희빈 장씨]]의장씨의 무죄 혹은 경형을 주장했고 [[남인]]에남인에 대한 온건 정책 및 탕평책을 주장했던 [[소론]] 역시 [[노론]]에노론에 의해 역당의 무리로 규정되어 중형을 받고 영구히 정계에서 축출될 뻔하였기에 감정이 불구대천의 원한으로 격화되었다. 이후 [[소론]]은소론은 왕세자([[조선 경종|경종]])를 지지하고 [[노론]]은노론은 [[숙빈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조선 영조|영조]])을 지지하여 경쟁하게 되었으며, 이는 [[조선 경종|경종]] 때의 [[신임사화]]와 [[조선 영조|영조]] 때의 [[이인좌의 난]], 나주벽서 사건, 토역경과투서 사건 등의 계기가 된다.
== 기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