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태그: m 모바일 웹 |
태그: m 모바일 웹 |
||
466번째 줄:
=== 효종 정통론 ===
{{참고|왕사부동례}}
윤선도는 [[정구]], [[허목]], [[윤휴]]와 함께 [[왕사부동례]]설을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조선 인조|인조]]의 왕통을 이은 것은 [[조선 효종|효종]]이므로
=== 북벌론에 대한 비판 ===
감사 이시만이 그의 상소를 올리지 않자 그는 [[윤인미]]를 시켜 직접 [[승정원]]에 상소를 올리게 하니, 승정원이 기각하려다가
=== 한의사 ===
윤선도는 의학 지식이 있어 치료를 하기도 했다. 의학과 관련하여 최초로 실록에 나타난 시기는 인조 10년이다. 인조, 효종,
고산선생이 의술을 접하게 된 경위를 사[[공조]][[참의]]소(辭工曹參議疏)에서 "어렸을 때 어버이의 질병 때문에 옛 의방을 검토하였으나, 지식이 얕아서 남들이 지나친 추대를 하여도 이것을 매개로 하여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을 한 적이 없다."고 하여 스스로 [[한의학]]을 연구하게 된 계기를 밝혔다. 의학을 일종의 천한 기술로 여기던 당대의 시류와는 달리 직접 진료를 하고, 처방전을 지어주기도 했다.
=== 서자에 대한 평등한 대우 ===
그에게는 여러 서자 서녀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고산은 경주설씨와의 사이에 난 아들 중에 [[윤학관]]을 매우 사랑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당시 서얼이 차별받는 신분사회였지만 고산은 무조건 서얼을 차별하려 했던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ref name="yang01"/> 적서차별이 존재하던
고산은 보길도에서 임종시에 학관이 시종토록 하였다고 한다.<ref name="yang01"/> 윤선도는 첩의 자식도 같은 자식이라 사랑함에는 다를 바 없었다고 하지만 선조의 유업은 서손에게 함부로 나누어 주지 않았다고 하여 신분사회의 한계는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은 인연 때문인지 서자 윤학관의 무덤은 윤선도의 무덤이 있는 금쇄동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에 잠들어 있다.<ref name="yang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