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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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이란은 아리아인, 즉 [[이란족]]들은 당시 그 땅을 정복했던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나 [[바빌로니아]]에 맞서 싸우는 용병 노릇을 하였으며, 곧 원주민들을 제치고 고원을 장악해 '이란'(아리아인의 땅)을 세운다. 기원전 7세기 쯤, 이란인들의 일파인 [[메디아인]]들이 [[아시리아]]로부터 독립해 남부 이란과 [[소아시아]]에 걸쳐 [[메디아 왕국]] (기원전 708년 ~ 기원전 550년)을 세워, 이란인이 세운 최초의 왕조였지만, 중앙 집권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부족 연합체에 그치고 말았다고 한다.
 
Piranshahr시는이란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이며 8000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ref>https://persiadigest.com/Piranshahrs-8000-year-old-artifacts-unearthed</ref> <ref>https://nation.com.pk/08-Jan-2019/8-000-years-old-artifacts-unearthed-in-iran</ref> <ref>https://pk.shafaqna.com/EN/AL/15972</ref> <ref>https://newspakistan.tv/8000-years-old-artifacts-unearthed-in-iran/</ref>
 
[[아리아인]]이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한 것은 기원전 621년 [[메디아]] 왕국의 [[아스티아게스]] 왕 때로, 아스티아게스는 [[바빌론]]과 연합해 [[아시리아]]를 무너뜨리고 메소포타미아의 북부 지역을 차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메디아는 [[티그리스 강|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유프라테스]] 연안의 '비옥한 [[초승달]]', 즉 오늘날의 [[이라크]] 땅을 차지하기 위해 [[신 바빌로니아 왕국]]에 맞섰으나 결국 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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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조의 수도는 [[바그다드]] 근처에 있는 [[크테시폰]]인데, 당시에 이미 200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던 대도시였다. 크테시폰은 바그다드의 건립자 [[아부 자파르 알만수르]]([[압바스 왕조]]의 2대 [[칼리프]])에 의해 파괴됐고 크테시폰의 건축물들은 [[바그다드]]의 건축 자재로 이용됐다고 한다.
 
== 이슬람아랍족의 종교화와융성과 중세 이란 ==
{{본문|이슬람의 페르시아 정복|우마이야 왕조}}
[[아랍족]]은 이란인들보다 문화적으로 뒤처져 있던 사막의 유목 민족이었다. 아랍족이 페르시아를 제치고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등장 이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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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을 정복한 아랍인들은 페르시아의 제도와 문화를 물려받았다. 특히 [[제국]]의 운영체제를 많이 배웠다. 서방 이슬람 학자인 버나드 루이스에 따르면 "이란은 처음부터 제국이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고대 페르시아 시절부터 이란은 제국을 이끌어왔고, 전제군주제에 익숙해 있다는 말이다. 이란의 군주인 샤 (Shah)는 (루이스에 따르면) 이집트의 [[파라오]], 중국의 [[황제]]와 비견되는 절대 군주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일례로 페르도우시(Ferdowsi, 935- ?)의 유명한 서사시 《[[샤나메]]》(‘왕들의 책’이라는 뜻) 영역본은 샤(Shah)와 왕(King)을 구분하고 있다. 이란의 샤를 ‘왕중의 왕’이라 하는 것을 보면, 당대 페르샤인의 자부심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이슬람화아랍 지배 뒤에도 이란인이 관료로 많이 등용됐고, 교육을 비롯한 철학, 문학, 법학, 의학 등 학문 발달에도 크게 기여했다. 아랍어가 공식 언어가 됐지만, 이란의 민중은 페르샤어(파르시)를 지켰다. 특히 샤나메를 비롯한 페르샤의 서사시는 유명하다. 파르시에서 파생된 말은 인도는 물론이고 아프간을 비롯해 '-스탄'으로 끝나는 대부분 나라에서 오늘날에도 쓰이고 있다.
 
== 이방에서 온 점령 왕조들 ==
== 튀르크 제국 ==
{{본문|셀주크 제국|일 한국|티무르 제국}}
 
압바스 왕조는 9세기 무렵부터 투르크 전사들을 용병으로 불러모았다. 왕조가 쇠하자 칼리프는 상징적인 종교지도자로 전락하고, 투르크 전사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중 돋보이는 것은 [[셀주크 투르크]](1037-1220)다. 이들은 오늘날의 아프간 지역, 즉 이란의 동쪽에서 출발해 서쪽으로 이란을 장악했다. 이스파한을 중심으로 밑으로는 인도, 서쪽으로는 이라크와 시리아에 이르는 땅이 아랍족에 이어 다시 투르크족의 지배를 받게 됐다. 당시 셀주크에 저항했던 이들이, 테헤란 근교 알무트에 근거지를 뒀던 '[[아사신|이스마일 암살단]]'이다. 이들은 알무트 일대를 장악하고 셀주크 왕조의 주요 인사들을 암살했는데, 이들이 해시시를 흡입했다는 데에서 영어 단어 ‘암살(assassin)’이란 말이 나왔다고 한다. 훗날 이들의 존재는 시아파 무슬림, 즉 이란인들의 폭력성을 강조하는 사례로 악용되기도 한다.
 
셀주크 투르크는 [[1219년]] 몽골족의몽골족에게 침략을무너진다. 받는다칸의 후예들은 페르샤 전역을 황폐화했다. 후세 입장에서 보자면 대규모 학살보다 더 안타까운 것이 문화유산의 파괴다. 칭기즈칸의 손자 [[훌라구 칸]]은 이란 땅에 [[일 한국]]을 건국했다.세웠는데, 가잔(Ghazan) 칸 치세(1295-1304)에 다시 역내 부흥이 이뤄진다. 그러나 1335년 [[아부 사이드]](Abu Said) 칸이 숨진 뒤 한국은 결국 사분오열한다.
 
이란 북동부에서 마지막칭기즈의 몽골후예 제국인중 강성했던 [[티무르]]가 제국 건설에 나선다. 티무르는 1381년 이란을 침공하고, 북인도와 서역, 소아시아에 이르는 제국을 세웠다. 페르샤 천년 고도 [[시라즈]]와 [[이스파한]]은 다시 초토화됐다. 티무르 제국은 1405년 티무르 사후 급속히 쇠퇴했고, 1501년까지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으나 중앙아시아의 튀르크인들에게 다시 정복당해 몽골 제국은 완전히 이란 지역과 중앙아시아에서 축출된다유지했다.
 
티무르 치하의 이란 북서부에는 [[사피 알딘]]이라는 이슬람 [[셰이크]](이슬람에는 원래 성직자 혹은 사제 개념이 없기 때문에 정확히 옮기기 힘들다)가 추종집단을 거느리고 살고 있었다. 당시 이단으로 배척받던 쉬아파들인 이들은 순니파의 탄압을 피해 은둔 생활을 해왔다. 1499년 이 집단의 지배권을 장악한 [[이스마일]]이 정복 전쟁을 일으킨다. 이스마일은 곧 이란 전역을 통일하고, 1501년 [[타브리즈]](Tabriz)를 수도로 [[사파비 왕조]](Safavid, 1501-1736)를 수립한다.
 
이로써 이란은 652년 아랍족 침입 이후 1,000년 만에 이민족의 지배를 벗어난다. 오랜 이민족 통치로 이란인들은 반외세 심리와 이방인에 대한 환대라는 상반되는 의식 구조를 갖게 됐다는 분석도 있고, 또 오랜 전제군주정과 외세 통치로 인해 절대 권력에 굴종하는 공포 심리가 체질화됐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적어도 이란은 지리적인 틀에서 이란 고원이라는 땅 안에 언제나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슬람 학자들은 이란이 외세의 지배를 받기는 했지만 ‘결코 땅과 나라 이름을 잃은 적은 없었다.’라고 말한다.
 
== 이슬람 시아파와 사파비 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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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외세 민족주의를 내세운 [[모하마드 모사데크]](Mohammad Mossadeq)가 이끄는 국민전선이 약진을 보이자 1951년 팔레비 국왕은 등떼밀려 그를 총리에 임명한다. 모사데크 총리는 취임과 동시에 유전 국유화를 단행했다. 이란 유전을 꿰차고 있던 영국은 이란의 자금을 차단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모사데크가 투데당과 협력할 움직임을 보이자,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까지 나서 군부 쿠데타를 사주한다. 모사데크는 반역 혐의로 체포된 뒤 3년간 복역하고 고향에 가택연금됐으며 1967년 사망했다.
 
모사데크를 쫓아낸 팔레비는 친미, 친영 노선을 노골화하고 정보기관비밀 겸 비밀경찰인경찰인 [[사바크국가정보안보기구]](SAVAK, 국가정보안보기구)를 동원해 반대파를 탄압했다. BP, 더치 셸 같은 서방 석유 회사들이 이란의 유전을 장악했다. 1955년에는 [[바그다드 조약]]이 성립된다. 바그다드 조약기구(중동조약기구 METO)는 터키·이라크·이란·파키스탄·영국으로 구성된 상호 방위 동맹으로, '가맹국의 안전을 위한 협력'을 목적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소련의 중동 진출을 막기 위해 결성된 것이었다. 회원국이 아닌 옵서버 자격으로 참가한 미국이 이 기구를 좌지우지했다. 1958년 이라크가 바트당 혁명 뒤 탈퇴하면서 이 기구는 해체되고, 소련에 맞선 군사조약기구인 [[중앙조약기구]](CENTO)가 만들어진다.
 
METO에 반강제적으로 가입한데 이어 팔레비 국왕은 1959년 미국과 방위조약을 체결, 미군 주둔을 허용한다. 1963년 팔레비는 6개항의 개혁조치를 국민투표에 부쳐 이른바 '백색혁명'을 시작했다. 주 내용은 토지 개혁, 근로자에 회사 이윤 분배, 삼림과 목초지 국유화, 국영 사업장 매각, 노동자, 농민에 유리하게 선거법 개정, 문맹 퇴치 지원 등이었으며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했다. 특히 역점을 두어 추진하였던 토지 개혁은 아버지 레자 샤 시절 무산됐던 것으로, 팔레비 국왕이 솔선해서 왕실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기도 했다.
 
하지만 토지 소유자와 겹치는 이슬람 성직자 진영은층은 이 조치에 크게 반발한다. 이들은 아야툴라 [[루홀라 호메이니]]의 지도 아래 반(反)백색혁명 운동을 벌였다. 호메이니는 가택연금 됐다가 이듬해 터키(뒤에는 이라크)로 망명했다. 성직자들의 반대 속에서도 토지 개혁은 진행됐고, 경제도 나아졌다.
 
국정에 자신감이 생긴 팔레비는 1967년 10월 오랫동안 미루어 왔던 대관식을 거행하고 1971년에는 페르시아 제국 창건 2,500주년 기념식을 페르세폴리스에서 성대히 거행하기도 했다. 내정이 안정되자 팔레비는 중동의 경찰 역을 자임하고 군비 강화에 나섰다. 내용은 실상 미제 무기 수입이었다. 국민들은 이런 친미 노선에 굴욕감을 느꼈고, 이슬람 전통을 무시한 서구화 정책에 반감을 가졌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전에 노엄 촘스키가 쓴 글을 보면, 이란이 당시 중동에서 지금의 이스라엘과 같은 역할, 즉 '미국의 경비견 노릇'(이건 내 말이 아니라 이스라엘 어느 총리의 표현이다.)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모사데크 국민전선의 한 분파인 이란 자유 운동,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 세력, 페다인(특공대 혹은 민병대)과 무자헤딘(이슬람 전사) 등 무장 단체들이 모두 반 팔레비 전선에 나서기 시작했다. 반 왕정 운동은 점차 조직화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