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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계량'''(卞季良, [[1369년]]~[[1430년]])은 여말선초의 정치가로,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805031&cid=41884&categoryId=55597 실용주의적 경세사관을 가지고 조선조의 기틀을 마련한 경세가(세종의 책사)]이다. 태종에 의해, 양녕, 안녕, 충녕대군(세종)의 스승(계성군과 함께)으로,고려 사마와 조선 문과 장원급제, 자는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 본관은 [[밀양 변씨|초계 (밀양)]]이며,<ref>[http://people.aks.ac.kr/front/srchservice/viewSearchPPL.jsp?pItemId=PPL&type=L&pType=P&pSearchSetId=51401&pTotalSearchCount=1&pPosition=0&pRecordId=00500050004C005F0036004A004F0061005F00410031003300360039005F0031005F0030003000300035003100330035&pName=BCC0ACC4B7C90028535E5B63826F0029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깨진 링크|url=http://people.aks.ac.kr/front/srchservice/viewSearchPPL.jsp?pItemId=PPL&type=L&pType=P&pSearchSetId=51401&pTotalSearchCount=1&pPosition=0&pRecordId=00500050004C005F0036004A004F0061005F00410031003300360039005F0031005F0030003000300035003100330035&pName=BCC0ACC4B7C90028535E5B63826F0029 }}</ref>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변옥란의 막내 아들로, 변중량이 형,누이친누이 존재 여부는 확인되지않음. 집현전 대제학, 진덕박사, 사헌부시사, 성균관학정, 예문관의 응교, 직제학, 예조우참의, 예문관제학, 예조판서, 참찬, 판우군 도총제부사를 지냈다. 변계량은 조선 초기 최고의 지성인으로,세종의 스승으로, 태조, 태종, 세종 3대의 국가의 제천 의식(태종의 기우제,강우성공)등 국가 서류 90%를 작성했다는 문필의 달인이었고,세종에게 집현전 설치와 대마도 정벌을 건의하고, 공정한 과거제를 운영하였다.
 
특히 변계량은 조선시대 대제학을 20년 지낸 당대 최고의 학문 권위자다. 권력이나 이권하고는 무관한 학문을 다루는 최고 직책 대제학은 명예를 중요시하는 사대부들의 선망의 대상으로 “정승 10명이 대제학 한 명만 못하다”라는 말을 남겼다. 대제학은 ‘학문을 저울질하여 올바르게 평가한다’고 했으며 학문과 관련되는 모든 관직을 거친 대과 급제자만 오를 수 있었다. 품계는 정2품으로 판서와 동급이지만 정승이나 판서보다 높게 대우 받았다. 대제학은 오늘날 관직상으로 [[교육부 장관]]에 해당되나, 공적으로 철저히 검증된 대과급제자에 한해서 정치적 경륜을 갖추고 학문적으로는 당대에 최고의 성리학자로 공인된 인물만이 임명될 수 있다는 점에서 최고의 명예로운 관직이었다. 관직상으로는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지낸 인물 가운데에서도 대제학을 지낸 인물이 소수라는 것은 정치적 또는 관료적 성격이 우선이 아니라 [[성리학]]의 학문성을 우선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제학과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낸 인물의 가문은 명문 가문 중에 명문 가문으로 존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