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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초기 활동 ===
아버지는
증조부는 최공(崔珙), 조부는 최안해(崔安海)이고 아버지 최하(崔荷)는 [[예빈시]]윤을 역임하고 사후 [[증직]]으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충주지씨로 [[문하시랑]]을 지낸 [[지용수]]
할아버지 최안해의 동생은 최안택인데 그는 의병장 [[최경회
=== 정치, 학문 활동 ===
==== 관료 생활과 학문 연구 ====
[[1419년]](세종 1년) 생원으로 증광문과(增廣文科) 을과에 급제하였다. 그해 [[홍문관]]에 보임되었고, 이듬해 [[집현전]]이 설치되자 정7품
집현전 관리로 세자의 서연을 담당하였으며, 그 뒤로 오랫동안 집현전에 몸을 담고 고제도(古制度) 연구에 몰두하여, 고제도의 해석과 번역, 적용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 중 오례(五禮)·시정(施政) 등 고제도의 연구와 해석에 심혈을 기울였고, 《자치통감훈의 資治通鑑訓議》·《정관정요주 貞觀政要註》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36년(세종 18) 4월에 집현전 직제학 최만리를 초시의 대독관(代讀官)이 되어 시험을 주관하였으며 [[1437년]]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고, 1439년에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집현전에 돌아와 [[부제학]]이 되었다.
==== 불교 배척과 유교 이념 적용 ====
[[1438년]]
집현전 부제학으로 재직 중 [[세종대왕]]이 연이어 가족을 잃고 [[불교]]에 관심을 보이자, 그는
==== 집현전 학사와 훈민정음 ====
{{참고|훈민정음}}
[[1443년]]
처음에 최만리는 한자를 버려서는안 된다고 하면서 [[이두]](吏讀)를 더 발전시키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고 했다.<ref name="park200687">박춘명, 《소설 훈민정음》 (이가서, 2006) 87페이지</ref> 이것은 집현전 학자들 내에서도 상반되는 의견 대립을 조성했다. 젊은 학자들은 뭣때문에 우리의 글을 만드는 데 한자를 이용하겠는가 라며 최만리의 견해에 반기를 들었다.<ref name="park200687"/>
[[1444년]] [[2월]] 최만리는 [[신석조]]
이때 연명 상소를 올린 학자들은 이 상소에서 중국과 다른 문자를 만드는 것은 사대모화(事大慕華)에 어긋나며, 스스로 이적(夷狄)이 되려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점, 이두(吏讀)는 한자를 배우는 데 도움이 되지만 언문(諺文)은 그렇지 못해 유익함이 없다는 점, 널리 의견을 묻지 않고 갑자기 이배(吏輩) 10여 명에게 언문을 가르쳐 고인이 이미 이룬 운서를 고쳐 인쇄하려는 것은 신중하지 못하다는 점, 동궁(東宮)이 언문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 등 반대의 이유 6가지를 제시했다.
최만리는 이때 상소를 올린 [[집현전]] 학자들의 대표격이었는데, 이에
==== 기타 상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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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4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1445년]] [[10월 23일]]에 사망했다. 시호는 공혜(恭惠)인데 ‘공(恭)’은 공경하여 순하게 위를 섬기는 것, ‘혜(惠)’는 너그럽고 넉넉하고 자애롭고 어진 것을 의미한다.
사후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지문리 산3(현 안성시 원곡면 지문리)에 안장되었고, 부인 중화양씨와 합장되었다. 묘소 근처에는 아버지 최하와 어머니 지씨 내외, 둘째아들 예조좌랑 최정(崔埥)과 며느리 여흥이씨 내외의 묘소 등이 있고, 사당인 강호재가 세워졌다. [[신도비]]는 [[1962년]] [[이숭녕]]
=== 사후 ===
딸 최씨를 통해 [[율곡 이이]]의 증외고조부가 된다. 딸은 [[대제학]]인 [[윤회 (조선)|윤회]]의 외손자인 덕수 이씨 이의석(李宜碩)에게 시집갔는데 최만리의 외손자는 이천이며 진외증손은
== 한글 창제 반대 상소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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