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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m 모바일 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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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초기 활동 ===
아버지는 [[최충]]의 후손 최하(崔荷)이다. 해동공자로 문헌공도와 사학12도를 세운 [[최충]](崔冲)의 12대손이며 [[고려]] 중기의 저명한 문인으로 보한집(補閑集)의 저자인 [[최자 (고려)|최자]](崔滋)의 6대손이다. 일찍이 불의와 타협을 거부하는 대쪽같은 성품을 지녔으며, [[생원시]]에 입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증조부는 최공(崔珙), 조부는 최안해(崔安海)이고 아버지 최하(崔荷)는 [[예빈시]]윤을 역임하고 사후 [[증직]]으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충주지씨로 [[문하시랑]]을 지낸 [[지용수]](池龍壽)의 딸이다. [[중화 양씨]] 판관 양미(楊美)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다섯 형제를 두었고, 딸 1명은 [[덕수이씨]] 이의석에게 출가하였다. 다섯째 아들 [[최연]]은 [[집현전]] 전한을 지냈는데 그는 후일 [[삼당시인]]의 한사람인 [[최경창]]의 고조부이자, [[조선]]후기에조선후기에 [[영의정]]을 지낸 [[최규서]]의 9대조가 된다.
 
할아버지 최안해의 동생은 최안택인데 그는 의병장 [[최경회(崔慶會)]]의 7대조가 된다.
 
=== 정치, 학문 활동 ===
==== 관료 생활과 학문 연구 ====
[[1419년]](세종 1년) 생원으로 증광문과(增廣文科) 을과에 급제하였다. 그해 [[홍문관]]에 보임되었고, 이듬해 [[집현전]]이 설치되자 정7품 [[집현전]] [[박사 (벼슬)|박사]]를 거쳤고 [[1427년]] 교리(校理)가 되었다. 교리 재직 중,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여 당상관으로 승진하였고, 응교·직제학·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427년(세종 9)에 교리로서 문과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응교에 올랐으며 같은 해 7월에 세자(훗날의 문종)가 조현(朝見)할 때 서장관겸검찰관(書狀官兼檢察官)이 되어 직제학 [[정인지(鄭麟趾)]]와 집의 김종과 함께 [[세자]]의세자의 사부가 되어 주강(晝講)을 담당하였다. 이어 집현전 응교가 되어 우문학(右文學)을 겸하였으며, 좌필선(左弼善) 정인지(鄭麟趾)와된 정인지와 함께 번갈아 가며 세자에게 고금의 고사성어와 훌륭한 정치를 강론하였다.
 
집현전 관리로 세자의 서연을 담당하였으며, 그 뒤로 오랫동안 집현전에 몸을 담고 고제도(古制度) 연구에 몰두하여, 고제도의 해석과 번역, 적용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 중 오례(五禮)·시정(施政) 등 고제도의 연구와 해석에 심혈을 기울였고, 《자치통감훈의 資治通鑑訓議》·《정관정요주 貞觀政要註》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36년(세종 18) 4월에 집현전 직제학 최만리를 초시의 대독관(代讀官)이 되어 시험을 주관하였으며 [[1437년]]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고, 1439년에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집현전에 돌아와 [[부제학]]이 되었다.
 
==== 불교 배척과 유교 이념 적용 ====
[[1438년]] [[7월]] 부제학이 되고 [[1439년]] [[6월]] 외직인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440년]] [[7월]] 다시 집현전부제학으로 복귀하였다. 집현전의 부제학으로서 14차에 걸쳐 상소를 올렸다. 그 중 불교배척 상소가 6회, 첨사원(詹事院) 설치 반대상소가 3회로서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밖에 일본과의 교역에서 석류황(石硫黃)의 대가를 지나치게 후하게 지불한 것에 대한 책임추궁, 진사시에서 시(詩)의 출제법이 잘못됨을 지적한 것, 그리고 [[이적]](李迹)의 사형 결정이 모호하다고 감형을 주장하기도 했다.
 
집현전 부제학으로 재직 중 [[세종대왕]]이 연이어 가족을 잃고 [[불교]]에 관심을 보이자, 그는 [[조선]]의조선의 건국 이념이 유교임을 들어 불교에 대한 왕실의 호의를 비판하였다. 이어 왕실의 지원을 받은 [[흥천사]](興天寺)의 사리각 중수에 반대하였고, 경찬회(慶讚會) 혁파와 불교 배척 상소롤 올렸고, 첨사원(詹事院) 설치 반대상소 등 14차례의 상소를 올려 [[불교]]의불교의 배척과 [[유교]]사상을 수호하였으며, 유학 사상을 엄격하게 적용하려 했다.
 
==== 집현전 학사와 훈민정음 ====
{{참고|훈민정음}}
[[1443년]] [[12월]] [[세종]]의 왕명으로 [[최항]](崔恒)·[[정인지]]·[[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 등의 [[집현전]] 소장학자들이 [[훈민정음]]을 연구하고 운회(韻會)의 번역으로 한자음을 개혁하려 하자, 그는 이를 반대하였다.
 
처음에 최만리는 한자를 버려서는안 된다고 하면서 [[이두]](吏讀)를 더 발전시키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고 했다.<ref name="park200687">박춘명, 《소설 훈민정음》 (이가서, 2006) 87페이지</ref> 이것은 집현전 학자들 내에서도 상반되는 의견 대립을 조성했다. 젊은 학자들은 뭣때문에 우리의 글을 만드는 데 한자를 이용하겠는가 라며 최만리의 견해에 반기를 들었다.<ref name="park200687"/>
 
[[1444년]] [[2월]] 최만리는 [[신석조]](辛碩祖), [[김문 (조선)|김문]](金汶), [[하위지]], [[정창손(鄭昌孫)]] 등 [[집현전]] 내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학자들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반대상소를 올렸다.
 
이때 연명 상소를 올린 학자들은 이 상소에서 중국과 다른 문자를 만드는 것은 사대모화(事大慕華)에 어긋나며, 스스로 이적(夷狄)이 되려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점, 이두(吏讀)는 한자를 배우는 데 도움이 되지만 언문(諺文)은 그렇지 못해 유익함이 없다는 점, 널리 의견을 묻지 않고 갑자기 이배(吏輩) 10여 명에게 언문을 가르쳐 고인이 이미 이룬 운서를 고쳐 인쇄하려는 것은 신중하지 못하다는 점, 동궁(東宮)이 언문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 등 반대의 이유 6가지를 제시했다.
 
최만리는 이때 상소를 올린 [[집현전]] 학자들의 대표격이었는데, 이에 [[세종]]의세종의 노여움을 사 책망받은 뒤, 친국을 당하기도 했다. 다음날 석방되었으나 사직하고 낙향했다.
 
==== 기타 상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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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4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1445년]] [[10월 23일]]에 사망했다. 시호는 공혜(恭惠)인데 ‘공(恭)’은 공경하여 순하게 위를 섬기는 것, ‘혜(惠)’는 너그럽고 넉넉하고 자애롭고 어진 것을 의미한다.
 
사후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지문리 산3(현 안성시 원곡면 지문리)에 안장되었고, 부인 중화양씨와 합장되었다. 묘소 근처에는 아버지 최하와 어머니 지씨 내외, 둘째아들 예조좌랑 최정(崔埥)과 며느리 여흥이씨 내외의 묘소 등이 있고, 사당인 강호재가 세워졌다. [[신도비]]는 [[1962년]] [[이숭녕]](李崇寧)이 짓고, 후손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 사후 ===
딸 최씨를 통해 [[율곡 이이]]의 증외고조부가 된다. 딸은 [[대제학]]인 [[윤회 (조선)|윤회]]의 외손자인 덕수 이씨 이의석(李宜碩)에게 시집갔는데 최만리의 외손자는 이천이며 진외증손은 [[율곡 이이]]의이이의 아버지인 이원수이다.
 
그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 [[집현전]] 학사들 중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입장의 대표자의 입장에 섰다. 이때 최만리와 함께 [[훈민정음]]을 반대하는 입장에 선 [[집현전]] 학사들은 [[정창손]], [[하위지]] 등이었다.
 
== 한글 창제 반대 상소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