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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돌목에서의 승리 후 이순신은 보급과 전력 열세 등의 문제로 수군을 거느리고 [[고군산군도]]까지 퇴각했고, 일본군이 [[부안]](扶安)까지 진출하며 [[강항]](姜沆)이 포로로 잡히는 등 일본군의 서해 진출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지만, [[경기도]](京畿道) 죽산(竹山)까지 북상했던 일본군이 수군으로부터의 보급 문제로 남쪽으로 항구를 찾아 내려오는 등 수륙 병진(竝進)을 통한 [[한양]] 공격 작전을 세우고 작전의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던 일본군은 울돌목에서의 패전으로 당초의 작전 계획이 모조리 무산되었고, 한겨울에 남해안 일대로 흩어져 본진이 있는 경상도 해안가로 돌아가 [[왜성]](倭城)을 쌓고 농성해야 했다.
흔히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왜장 마다시(馬多時)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렇지만 난중일기는 통제사가 이끄는 공격대의 기록일뿐 [[명량해전]] 전체를 기록한것은 아니다. 조선수군은 임하도를 중심으로 두패로 나누어서 서로 각기 다른 작전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
== 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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