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루시마 미치후사: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48번째 줄:
울돌목에서의 승리 후 이순신은 보급과 전력 열세 등의 문제로 수군을 거느리고 [[고군산군도]]까지 퇴각했고, 일본군이 [[부안]](扶安)까지 진출하며 [[강항]](姜沆)이 포로로 잡히는 등 일본군의 서해 진출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지만, [[경기도]](京畿道) 죽산(竹山)까지 북상했던 일본군이 수군으로부터의 보급 문제로 남쪽으로 항구를 찾아 내려오는 등 수륙 병진(竝進)을 통한 [[한양]] 공격 작전을 세우고 작전의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던 일본군은 울돌목에서의 패전으로 당초의 작전 계획이 모조리 무산되었고, 한겨울에 남해안 일대로 흩어져 본진이 있는 경상도 해안가로 돌아가 [[왜성]](倭城)을 쌓고 농성해야 했다.
 
흔히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왜장 마다시(馬多時)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렇지만 난중일기는 통제사가 이끄는 공격대의 기록일뿐 [[명량해전]] 전체를 기록한것은 아니다. 조선수군은 임하도를 중심으로 두패로 나누어서 서로 각기 다른 작전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중묘중흥지선묘중흥지"에는 내도수는 마다시와 다른 인물로 기록되어 있으며 통제사가 화공으로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수군을 공격할때 사망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마다시란 인물의 후보중에 [[아와지 섬]]을 중심으로 활약한 해상세력 간 씨(菅氏) 집안의 간 헤이에몬(菅平右衛門)의 아들 가운데 한 명인 간 마사카게(菅正陰)로 마타시로(又四郎)라는 통칭되던 인물이 거론되고 있다. 간 마타시로 마사카게 또한 명량에서 죽었고 '마타시로'와 '마다시'의 일본어 독음도 서로 같다.<ref>{{웹 인용 |url=http://homepage2.nifty.com/H-Suga/kan11.html |제목=아와지 간 수군의 역사_10장_간 헤이에몬의 자제 |확인날짜=2016년 2월 23일 |보존url=https://archive.is/20120709222429/http://homepage2.nifty.com/H-Suga/kan11.html |보존날짜=2012년 7월 9일 |깨진링크=예 }}</ref>
 
== 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