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다 도시이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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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와리 국]] 가이토 군({{lang|ja|海東郡}}) 아라코 촌({{lang|ja|荒子村}}) (현재의 [[아이치현]] [[나고야 시]] [[나카가와 구]])의 토호였던 마에다 도시마사({{lang|ja|前田利昌}})의 4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적의 이름은 이누치요({{lang|ja|犬千代}}), [[1551년]]([[덴분]] 20년)에 14세의 나이에, [[오다 노부나가]]를 모시게 되며, 성인이 되어 '마에다 마타자에몬 도시이에'({{lang|ja|前田又左衞門利家}})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마타시로({{lang|ja|又四郎}})라는 이름도 사용)
 
청년 시대에는 혈기가 넘치는 모습으로, '창의 마타자에몬', '창의 마타자' 등의 별명으로도 불리었다. [[1552년]] (덴분 21년)의 가야즈 전투({{lang|ja|萱津の戦い}})에 첫 출진을 하여, 오다 가문의 권력 투쟁 격인 이노 전투({{lang|ja|稲生の戦い}})에서 공적을 세웠다. 이후 노부나가의 친위 부대인 아카호로슈({{lang|ja|赤母衣衆}})의 일원이 되어, 녹읍을 받고 가신을 거느리게 되었다. [[1558년]] ([[에이로쿠]]({{lang|ja|永禄}}) 원년)에 마쓰({{lang|ja|まつ}}, 호슌인({{lang|ja|芳春院}}))을 아내로 받아들이게 되나, 다음해 [[1559년]] 아카호로슈의 동료였던 주아미({{lang|ja|拾阿弥}})와 다투다가 그를 죽인 죄로 인해 출사를 정지당하는 처분을 받아 직을 잃게 된다.
 
그러나 다음 해인 [[1560년]] (에이로쿠 3년), [[오케하자마 전투]] 및 모리베 전투({{lang|ja|森部の戦い}})의 공적으로 다시 노부나가의 부름을 받게 된다. 도시이에의 처분 기간 중 부친 도시마사가 죽어, 마에다 가문의 장남이었던 도시히사({{lang|ja|利久}})가 당주 자리를 물려받았으나, 노부나가는 [[1569년]](에이로쿠 12년)에 도시이에를 마에가 가문의 당주자리를 물려받도록 명한다.
 
이후 도시이에는 노부나가가 추진하는 센고쿠 통일 사업에 참가해 [[1570년]] ([[겐키]]({{lang|ja|元亀}}) 원년) 9월에는 아자이 씨({{lang|ja|浅井氏}})·아사쿠라 씨({{lang|ja|朝倉氏}})와의 [[아네가와 전투]]({{lang|ja|姉川の戦い}}), [[1574년]] 덴쇼 2년의 [[나가시마의 잇코잇키]]({{lang|ja|長島一向一揆}}), [[1575년]](덴쇼 3년)의 [[나가시노 전투]]({{lang|ja|長篠の戦い}}) 등에 {{출처|날짜=2010-7-3|참전한 것으로 확인되나, 높은 직책을 받지 못하여 큰 무공을 세울 기회는 적었었으라 여겨진다.}}
 
=== 호쿠리쿠 방면 ===
[[1574년]] (덴쇼 2년)에는 [[시바타 가쓰이에]]({{lang|ja|柴田勝家}}) 휘하의 무장으로 [[에치젠 국]]의 난 진압에 참가하였다. 다음 해 난이 평정된 후 [[삿사 나리마사]]({{lang|ja|佐々成政}}), [[후와 미쓰하루]]({{lang|ja|不破光治}})와 함께 후추 10만 석을 수여받았다. (이들 3명은 이후 후추산닌슈(府中三人衆)라 불리게 되었다) 그 뒤로도 [[시바타 가쓰이에]]의가쓰이에의 밑에서 우에스기 군과의 전투 등 [[호쿠리쿠 지방]]의 평정에 종사하였으나, 한편 노부나가의 명에 의해 [[셋쓰 국]]의 아리오카 성(有岡城) 공성전, [[하리마 국]]의 미키 성(三木城) 공성전 (이른바 '미키합전'(三木合戦))에도 참가하는 등, 노부나가의 직접 지휘 또한 계속 받았었다고 여겨진다.
 
[[1581년]] (덴쇼 9년)에 [[우에스기 가게카쓰]] 군이 토벌당한 [[노토 국]]의 [[나나오 성]](七尾城, [[이시카와현]] [[나나오 시]])의 주인이 되어, 노토 지역의 23만석을 소유한 [[다이묘]]가 되었다. 다음해 난공불락이기는 하나 나루터에 가까운 마을과는 떨어져 있었던 나나오 성을 폐성시키고, 나루터를 둘러싼 작은 산을 근거지로 삼아 [[고마루야마 성]]({{lang|ja|小丸山城}}, 나나오 시)을 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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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즈가타케 전투 ===
{{본문|시즈가타케 전투}}
[[1582년]] (덴쇼 10년) 6월의 [[혼노지의 변]]({{lang|ja|本能寺の変}})으로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에 의해 쓰러질 당시, 도시이에는 [[시바타 가쓰이에]]를 따라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농성중인 [[엣추 국]]의 [[우오즈 성]](魚津城)을 공략하고 있었던 중이라, 히데요시의 미쓰히데 공격에 참가하지는 못하였다.
 
미쓰히데가 죽은 후 얼마 되지 않은 같은 달 27일, 오다 가문의 후계자 인사 등을 결정하는 기요스 회의({{lang|ja|清洲会議}})에서 [[하시바 히데요시]]({{lang|ja|羽柴秀吉}}, 뒤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시바타 가쓰이에]]가 대립하게 되어, 시바타 밑에 있었던 도시이에 또한 시바타 편에 섰다. 같은 해 11월에 가쓰이에의 명을 받아, [[가나모리 나가치카]], 후와 나오미쓰와 함께, [[야마시로 국|야마시로]]의 호세키지 성({{lang|ja|宝積寺城}}, 현 [[교토부]] [[오야마자키 정]])에 있었던 히데요시와 대치하여, 일시적 화해 교섭을 시도하나, 이 때에 히데요시에게 거꾸로 회유를 당하였다고 전해진다. (도시이에와 히데요시는 예전부터 친우 관계에 있었기에, 옛 친구와 대립하게 되는 것으로 고심을 하였다고 한다)
 
다음해인 [[1583년]] (덴쇼 11년) 4월의 [[시즈가타케 전투]]({{lang|ja|賤ヶ岳の戦い}})에서, 도시이에는 5,000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시바타 군에 포함되어 포진을 하였으나, 전투의 와중에 돌연 퇴각을 하여, 이로 인해 하시바 군의 승리가 결정지어지게 되었다. 이 후 에치젠의 후추 성([[후쿠이현]] [[에치젠 시]] 소재, 구 다케후(武生) 시)에 진을 친 도시이에는, 그 후 히데요시의 사자로 온 [[호리 히데마사]]의 권고에 따라 항복하여, [[기타노쇼 성]](후쿠이 시)에 틀어박힌 [[시바타 가쓰이에]] 토벌군의 선봉이 된다. 이 전투 후 기존 영지의 보전은 물론, [[사쿠마 모리마사]]({{lang|ja|佐久間盛政}})의 영지였던 [[가가 국]]의 2개의 군(郡)을 받아, 오야마 성(尾山城, 이후의 [[가나자와 성]])으로 본거지를 옮긴다.
 
[[1584년]] (덴쇼 12년), 히데요시와 [[오다 노부카쓰]] 간의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는 오다 측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호응하여 노토를 침공한 [[삿사 나리마사]]를 [[스에모리 성 (이시카와 현)|스에모리 성]](末森城)에서 격퇴하였다. 다음 해인 [[1585년]]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히데요시는 엣추 국을 공격하여 삿사의 항복을 받아낸다.
 
=== 도요토미 정권 ===
그 후, [[규슈 정벌]]에서는 8,000의 병력으로 히데요시의 본거지의 수비를 맡았다. (대신 아들 [[마에다 도시나가|도시나가]]가 규슈까지 종군함) [[1590년]]의 [[고호조 씨|호조 가문]]의 제압을 위한 [[오다와라 정벌]]에서는 [[우에스기 가게카쓰]]와 [[사나다 마사유키]]({{lang|ja|真田昌幸}}) 등과 함께 [[하치오지 성]] 등 호조 가문의 성들을 제압하였다. 그 후 오슈(奥州, 도호쿠 지방)의 [[난부 노부나오]]({{lang|ja|南部信直}}),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 등을 도요토미 가문으로 복속시키는 교섭 역할을 맡았다.
 
일본 국내를 통일한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켰을 당시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더불어 [[나고야 성 (사가 현)|나고야 성]](名護屋城) 진중에 남아 있었다. 이때 마츠의 시녀 지요(千代)와의 사이에서 아들 '사루치요'({{lang|ja|猿千代}}), 이후에 제3대 가가 번주가 되는 [[마에다 도시쓰네]]({{lang|ja|前田利常}})를 얻게 된다.
 
[[도요토미 정권]]기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나란히 중신으로서의 대접을 받아, 히데요시가 [[오대로]], [[오부교]] 제도를 세울 당시 도시이에를 5대로의 서열 2위로서 [[다이나곤]]({{lang|ja|大納言}}) 관직을 수여하였으며, 히데요시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히데요리]]의 후견인의 위치에 있었다. [[1598년]] 집안의 상속권을 장남 도시나가에게 물려주고 은퇴한다. 그 뒤 병으로 인해 위독해진 히데요시는 히데요리를 도시이에에게 맡기며 사망한다.
 
=== 말년 ===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와의 약속을 깨고, [[다테 마사무네]]와 [[하치스카 이에마사]]({{lang|ja|蜂須賀家政}}) 등과의 무단 혼인 정책을 진행시키자, 도시이에는 이에 반발하며 전 다이묘들이 이에야스 및 도시이에의 저택에 집결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도시이에 쪽으로는 3명의 대로 [[우에스기 가게카쓰]],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우키타 히데이에]]({{lang|ja|宇喜多秀家}})와 [[이시다 미쓰나리]]({{lang|ja|石田三成}}),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 쪽으로 붙게 되는 [[호소카와 다다오키]]({{lang|ja|細川忠興}}), [[아사노 요시나가]]({{lang|ja|浅野幸長}}), [[가토 기요마사]], [[가토 요시아키]]({{lang|ja|加藤嘉明}}) 등이 가담했으나, 도시이에가 이에야스 쪽을 방문하게 되며, 이에야스도 도시이에와 대립하는 것은 불리함을 깨닫고 화해를 하게 된다. 그 직후, 도시이에의 병이 악화되어, 이에야스가 문병을 위해 도시이에의 자택을 방문했을 당시, 도시이에가 칼을 이불 밑에 숨겨놓았었다는 에피소드가 남아 있다.
 
[[오사카]](大坂)의 자택에서 향년 61세를 일기로 병사한다.
 
도시이에의 사망 후, 이에야스에 의해 가가(加賀) 정벌이 검토될 당시, 장남 [[마에다 도시나가]]는 처음에는 이에 맞서기 위해 성을 증강하는 등의 준비를 하였으나, 어머니 [[호슌인]]({{lang|ja|芳春院}})이 인질이 되는 것을 조건으로 철회를 하게 된다. 이후 우에스기가 이에야스에 항명을 하여 약 80만 석을 잃게 된 결과를 볼 때 마에다 가문의 선견지명이 옳았으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에야스와 유일하게 맞설 수 있을 정도의 인망과 무략을 가졌던 도시이에의 사망은, 도요토미 가문의 멸망의 결정적인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는 해석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