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지: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0 개의 출처 구조, 2 개의 링크를 깨진 것으로 표시 #IABot (v2.0beta10)
태그: m 모바일 웹
43번째 줄:
== 생애 ==
=== 생애 초반 ===
왕자지는 [[1066년]] [[개경부|개경]]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대는 본래 박씨(朴氏)로 [[대상]](大相) [[왕유]](王儒)후손이었다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선조 [[왕유]]는왕유는 원래 [[궁예]]의 [[태봉]]국에서 원외(員外), 동궁기실(東宮記室)을 역임했으나 [[궁예]]의궁예의 난정(亂政)에 실망, 출가하여 산속에 은거하다가 [[918년]] [[고려 태조]] [[왕건]]을 만나 여러 요직을 거쳐 공을 세워 왕씨(王氏) 성을 받았다. [[932년]](고려태조 15) [[대상]](大相)이 되어 [[5대 10국]]의 [[후당]](後唐)에 파견되어 조공(朝貢)을 바치고 태조를 [[고려왕]], 왕비 유씨(柳氏)를 [[하동군부인]](河東郡夫人)에 책봉할 것을 주청(奏請), 승인을 얻어 책봉고명서를 받아 왔고 후에 [[해주 왕씨]](海州王氏)의 시조가 되었다. 일설에는 그의 선조 [[왕유]]는 일설에는 [[중국]] [[산동성]](山東省)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
 
그는 일설에는 [[왕유]](王儒)의왕유의 4대손이라고 하나 그의 가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자는 원장(元長)이었고 처음 이름은 소중(紹中)인데 뒤에 자지(字之)로 개명하였다. [[서리]]로 출발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 관료 생활과 여진족 토벌 참전 ===
[[파일:척경입비도 3.jpg|섬네일|right|170px|척경입비도, 윤관 등이 여진족정벌 직후 국경비를 세우는 장면 (17세기 민화)]]
{{참고|강동 6주|동북 9성}}
그는 [[음서 제도|음서]]로 출사하여 서리(胥吏)가 되고 여러 관직을 지냈다. 그 뒤 그의 매부인 [[왕국모]](王國髦)가 [[이자의]](李資義)를 죽일 때 협력하여 [[도교령]](都校令)에 임명되었다.<ref name="국역 28" /> 이때 그는 궐문을 지키고 있었고 왕국모가 성공하면서 요직에 발탁되었다.
 
왕자지는 [[고려 숙종|숙종]] 때 [[내시]](內侍) 등을 지내고 두번 전직하여 [[전중시어사]]가 되었다.<ref name="국역 28"/> 예종 때인 [[1108년]](예종 3년) [[병마]][[판관]](兵馬判官)으로 [[대원수]] [[윤관]](尹瓘)의 부장으로 출정, [[윤관]], [[오연총]] 등과 함께 함주(咸州) 등지에서 [[여진족]]을 정벌하였다. 여러번 싸워서 공을 세웠다. 그 뒤 [[전중소감]](殿中小監) 등을 거쳤다.<ref name="국역 28"/>
 
이때 [[여진족]]의여진족의 기습공격을 받고 [[고려]]군이고려군이 퇴각할 때 그는 말을 잃어버리고 화살을 맞아 죽을 위기에 처했으나 [[척준경]]이 달려와 그를 구출하여 되돌아갔고, [[척준경]]은척준경은 말을 잃은 그를 위해 [[여진족]]을여진족을 추격하여 사살하고 장갑마 한필을 구해 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척준경]]과 가까워졌다고 한다. 그는 여러 번 [[윤관]] 등을 도와 [[여진족]] 정벌에 출정하여 승리하고 돌아왔다.
 
그 뒤 [[이부]][[시랑]] [[추밀원]][[좌승선]](吏部侍郞樞密院左承宣)을 거쳐 [[1113년]](예종 8년) [[12월]] [[예빈시|예빈시경]](禮賓侍卿)이 되었다. 그 뒤 [[전중시]][[소감]](殿中侍少監), [[전중감]] 등을 거쳐 [[1115년]] [[이부]][[상서]](吏部尙書)가 되고, 그해 사은 겸 진봉사(謝恩兼進奉使)로 [[송나라]] [[개봉부]]에 파견되었다.
 
[[1116년]](예종 11년) [[음력 6월]] 왕자지(王字之)는 [[하례사]]로 임명되어 [[문공미]](文公美)와 함께 [[송나라]]에 갔다가 [[송나라]] [[북송 휘종|휘종]]에게 [[대성아악]](大晟雅樂)을 전수받아 [[고려]]에고려에 도입하였다.<ref>[http://www.art.go.kr/vli_dir/vli_dir08_pop_detail.jsp?ar_vvm_cd_seq=418 예술로<!-- 봇이 붙인 제목 -->]{{깨진 링크|url=http://www.art.go.kr/vli_dir/vli_dir08_pop_detail.jsp?ar_vvm_cd_seq=418 }}</ref><ref>[http://pda.mct.go.kr/open_content/administrative/news/press_read.jsp?seq=4758&page=430&search=&keyWord= 문화체육관광부<!-- 봇이 붙인 제목 -->]{{깨진 링크|url=http://pda.mct.go.kr/open_content/administrative/news/press_read.jsp?seq=4758&page=430&search=&keyWord= }}</ref><ref>http://www.yugyo.org/kor/culture/art/art_view.php?art_code=A0005&art_gubun=B&lang_code=KOR{{ {{웨이백|url=http://www.yugyo.org/kor/culture/art/art_view.php?art_code=A0005&art_gubun=B&lang_code=KOR |date=20050130035823 }}</ref>
 
=== 생애 후반 ===
왕자지는 [[1117년]](고려예종 12년)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동지사|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병부]][[상서]] 겸 [[지추밀원사]](兵部尙書兼知樞密院事), [[1118년]] [[동북면]][[병마사]] 겸 지행영[[병마사]](東北面兵馬使兼知行營兵馬事)로 나갔다가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1119년]] [[추밀원|추밀원사]] 겸 [[판삼사사]](樞密院使兼判三司事)가 되고, [[호부]][[상서]]를 거쳐 [[1122년]] [[3월]] [[이부]][[상서]](吏部尙書)가 되었다가 [[참지정사]] 판[[호부]]사(參知政事判戶部事)가 되었다.
 
[[1122년]](예종 17년) [[음력 3월 24일]] [[참지정사]]로 재직 중 [[개경부|개경]]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그의나이는 향년 57세였다. 예종은 왕자지의 죽음을 슬퍼하여 3일간 조회를 파하고 부의를 내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