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해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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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사는 일기나 장계에 좁은 수로에서의 전과를 왜 기록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는 부하들의 전공만 기재를 하고 자신의 전공을 기재하지 않은 적도 있기 때문에 해전 위치와 전술을 노출시키지 않거나 전공에 대한 부담으로 고의로 누락 시켰다는 설도 있다.
 
전풍상에 의하면 [[도도다카토라]]는 명량에서 통제사와 접전하여 자기 부하 절반이 죽고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하였으므로 최소 60여척의 왜선이 격침되거나 전투 불능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에 대한 평가는 이르지만이는 난중일기에 기록된 격파된 왜선수 30척보다 2배나 많은 숫자에 해당된다. 따라서 난중일기는 좁은 수로를 지키고 있던 조선 수군의 피해 상황과 전투 기록이 누락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행스러운것은 [[난중잡록]]은 난중일기에서 기록되지 않은 전투상황의 기록이므로 상당수의 일본군이 화전(火戰)에 의해 피해를 보았음을 알 수 있으며 통제사가 30척을 격파하고 해남명량대첩비에 100척이 화공으로 침몰하고 난중잡록에 10척이 도주를 했다고 하였으므로 왜선은 약 130-140척이 되는 셈이다. 여기에 [[도도다카토라]]의 살아남은 60척을 더하면 200척이 된다. 도도다카토라(藤堂高虎,山道)가 120척의 전선을 가지고 왔으며 다른 왜장의 전선까지 합치면 200척(추정)이나 되지만 역시 일본군의 전체 병력 수를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특히 [[선묘중흥지]]에는 [[난중일기]]에서 누락된 부분과 [[난중잡록]]에서 누락된 부분이 함께 기록되어 있으므로 해전 경과를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선묘중흥지]]에는 "모리민부"가 바다에 떨어졌으나 구조가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일본측 기록인 "고산공실록"과 "모리고동문서"와 일치하는 부분이므로 [[선묘중흥지]]는 상당히 신뢰할만한 기록임에는 틀림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