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사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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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민주주의 ===
[[마오쩌둥]]은 [[태평천국의 난]]을 시작으로 하여 [[신해혁명]]을 끝으로 [[중국]]이 반봉건-반자본주의(半封建半資本主義) 정체성(政體性)을 확보했다고 봤다. 그러나 앞선 단어에서 유추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완전한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바로 여기서 [[마오쩌둥]]은 확고한 자본주의 사회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을 신삼민주의(新三民主義)라 칭하였고, 앞서 서술한 반봉건-반자본주의(半封建半資本主義)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구삼민주의(舊三民主義)라고 규정하였다.<ref>마오쩌둥 저, 이등연 역, 『마오쩌둥 주요 문선』(학고방, 2018) pp. 193 - 198(신민주주의론)</ref> 그러나, 부르주아의 힘으로 독립적인 자본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던 신삼민주의자들의 염원은 열강 세력의 침탈로 인해 이루기 요원한 것이 되었다. 마오쩌둥은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형태의 인민정권을 구상하여 민족자본가와 노동자, 그리고 농민 세력이 연합된 신민주주의정부(新民主主義政府)를 건설하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운동의 흐름을 '반제반봉건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反帝反封建資產階級民主革命)이라 칭한다칭하며, 마오쩌둥은 이것의 최초 격발을 [[5·4 운동]]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그의 단계론 해석은 이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던 단계론과 상당히 다른 것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그는 바로 소비에트 사회주의 체제로 나아가야 한다는 극좌모험주의적 경향과 당시의 권위주의적 군벌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반동적 의견을 모두 비판하였다.<ref>마오쩌둥 저, 이등연 역, 『마오쩌둥 주요 문선』(학고방, 2018) pp. 213 - 227(신민주주의론)</ref> 그리고 이러한 노선은 [[1930년대]] [[김일성]]이 이끌던 빨치산파에 의해 수용되었으며,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인 [[호치민]]도 또한, 이 노선을 받아들인다. [[대한민국]]의 경우는 [[1980년대]] [[민족 해방]] 학생운동계파가 한국 사회의 성격을 이 노선에 기반하여 해석했으며, [[민중 민주]] 계파의 사회구성체론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신민주주의론은 인구의 대다수가 농민인 것과 동시에, 반공주의적 정서가 강했던 당시 중국 현실을 반영한 특수한 형태의 단계론인 것이다. [[마오쩌둥]]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에도 해당 시점의 단계를 신민주주의 단계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그는 당시 중국 내 정파였던 민주연맹과 같은 자유주의자들과도 연합한다. 그리고 [[1958년]]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생산력을 산출하기 위한 [[대약진운동]]이 시작됐는데, 이도 역시 신민주주의론에 기초하여 시작된, 자주적인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생산력 증강 정책이기도 하였다. 국유화, 국가 주도의 산업 자본 투자, 외세의 개입 차단, 민족자본가들과의 통일전선 등을 통한 자력 발전 요소는 [[종속 이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마오쩌둥 사상은 자본주의 발전 정도가 높은 국가에 한해서는 신민주주의노선이 아닌 사회주의혁명노선을 취해야 함을 강조한다. 따라서, 마오쩌둥 사상은 신식민지 상태하에서 반봉건-반자본주의(半封建半資本主義)를 강요받는 국가에 적합한 것이며, 마오쩌둥 사상 자체도 이것을 인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