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아누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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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다른 군인 출신 황제와는 달리 발레리아누스 자신은 유서 깊은 [[로마 원로원]] 의원 일족 출신이었다.{{sfn|Chisholm|1911}} 그의 전반생은 확실하지 않지만, 에그나티아 마니아나와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다고 하며, 여기에는 훗날 로마 황제가 되는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이그나티우스 갈리에누스와 발레리아누스 미노르도 있었다.
 
238년의 로마 내전 속에서 여섯 황제의 한 사람이었던 고르디아누스 1세에 의해 일찍이 프린켑스 세나투스로 선출되었다. 당시 고르디아누스 1세는 원로원 의원 가문 출신인 발레리아누스를 통해 원로원과 교섭하고자 한 것이다. [[244년]]에 미시케(Mesiche)라는 곳에서 [[사산 조 페르시아]]의 대왕(샤힌샤) [[샤푸르 1세]]와의 전투에서 고르디아누스 1세의 손자 고르디아누스 3세가 죽고(이를 필리포스의 쿠데타에 의한 것이라고도 한다), 필리포스 아라부스가 군영 안에서 스스로 황제(임페라토르)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249년]]에 [[필리포스]]가 데키우스에게 피살되고, 황제(임페라토르)가 된 데키우스에게 [[251년]] 감찰관(콘술)로 선출된다. 또한 라인 강 연안의 노리쿰과 라에티아 두 속주의 총독(코메스)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