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아누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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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키우스가 아브리투스에서 전사하고 뒤를 이은 [[트레보니우스 갈루스]] 때에도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총독(코메스)으로 일하는 등, 발레리아누스의 지위는 유지되었지만, 마르쿠스 아이밀리아누스가 반란을 일으켜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및 그 공동 황제였던 가이우스 볼루시아누스(Gaius Vibius Volusianus)가 피살되자, 아이밀리아누스를 내쫓기 위해 발레리아누스는 군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얼마 안 가서 아이밀리아누스는 자신의 병사들에게 살해당했고, 253년에 발레리아누스가 로마의 황제(임페라토르)가 되었다.
 
발레리아누스는 황제가 된 뒤 데키우스의 [[기독교]] 박해 정책을 더욱 강화하여 [[카르타고]] 주교 [[치프리아누스]]와 [[교황|로마 주교]] [[교황 식스토 2세|식스토 2세]]를 처형했다.{{sfn|Baudoin|2006|p=19}} 한편 그는 아들 [[갈리에누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해 로마 제국의 서반부를 맡기고, 자신은 사산 조 페르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던 동쪽을 맡았다. 그러나 [[259년]], 군세를 몰아 페르시아로 쳐들어 갔던 발레리아누스는 그만 에데사(지금의 샨리우르파)에서 샤푸르 1세에게 패해 포로가 되고 말았다(에데사 전투).
 
=== 페르시아의 포로 ===
그러나 [[259년]], 군세를 몰아 페르시아로 쳐들어 갔던 발레리아누스는 그만 에데사(지금의 샨리우르파) 전투에서 샤푸르 1세에게 패해 포로가 되고 말았다. 포로가 된 발레리아누스는 비샤푸르로 압송되어, 죽을 때까지 노예 취급을 받으며 사후에도 박제가 되어 신전에 전시되었다고 알려진다.{{sfn|Chisholm|1911}}<ref>Eutropius. Abridgement of Roman History. Translated by the Rev. John Selby Watson.
London: Henry G. Bohn, 1853. (Book 9.7)</ref> 황제(임페라토르)가 적국의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로마에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그 뒤로도 [[11세기]] [[셀주크 투르크]]와의 전투에서 포로가 된 [[동로마]]의 [[로마노스 4세|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 외에는 이러한 사례가 없었다. 이 사건은 데키우스가 전사한 아브리투스 전투와 함께 로마 제국의 국력 저하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평가받으며, 이후 로마 세계는 스스로 황제(임페라토르)를 참칭하는 자들의 난립과 영토 분열 등으로 그 혼란이 더욱 심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