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 (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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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붕당정치와 왕권 강화 ===
14년간 집권한 현종의[[조선 현종|현종]]의 뒤를 이어 등극한 숙종은 45년간 장기집권하면서 자신의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지금까지의 당파연립 방식을 버리고, 붕당을[[붕당]]을 자주 교체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를 당시에는 ‘환국’이라‘[[환국]]’이라 하였다. 환국정치운영은 말하자면 군주가 내각을 자주 교체하여 신하들의 충성심을 경쟁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방법이었다. 외형상으로 보면 숙종 시대는 붕당 싸움이 가장 치열한 시기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치열한 정책대결 속에서 국가발전이 가속화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숙종 초에는 왕권 강화를 주장해 온 남인이[[남인]]이 집권하였는데,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사망을 계기로 다시 일어난 [[복상논쟁]]에서 왕이 남인의 주장을 채택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때 송시열 등 서인은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입어야 할 상복을 9개월(大功)로 주장했고, 허목 등 남인은 1년 상복을 주장했다. 남인의 승리는 현종 중반 이후 기반을 다져 온 허적 일파의 정치적 성장이 바탕이 되었다.
 
숙종 즉위 초에 집권한 남인은 [[허적·]]과 [[윤휴]] 등 이른바 온건한 탁남이 주동이 되어 북벌론을[[북벌론]]을 다시 제기하였다. 이를 위해서 ‘도체찰사’라는 새로운 군정기관을 부활시키고, 그 본진으로서 [[개성]] 부근의 [[대흥산성]](1676년)을 축조했으며, 한꺼번에 1만8천여 명의 무과 합격자를 뽑아 군사훈련을 강화하는 등 군비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평안도 용강의 황룡산성과[[황룡산성]]과 강화도의 48개 돈대(망루)도 이 무렵에 축조되었다. 이 같은 북벌 계획의 재등장은 마침 [[1674년]](숙종 원년) [[청나라]]에서 [[오삼계]]의 반란이 일어나 청나라가 어려운 처지에 빠진 것이 계기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남인 정권의 권력기반을 안정시키려는 뜻도 있었다.
 
그러나 수세에 몰렸던 서인은 [[1680년]](숙종 6년) 남인 영수 허적이 대흥산성의 군인을 동원해 역모를 꾸몄다고 고발하여, 허적·윤휴 등을 사형시키고 나머지 남인들도 축출했다. 이 사건을 ‘경신환국’이라[[경신환국]]이라 한다. 이 무렵 서인은 자체 분열을 일으켜 송시열을[[송시열]]을 영수로 하는 노론과[[노론]]과 윤증을[[윤증]]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으로[[소론]]으로 갈라졌다([[1683년]]). 노론은 대의명분을 존중하고, 내수외양, 즉 민생안정과 자치자강을 강조하였으며, 소론은 실리를 중시하고 적극적인 북방개척을 주장한 점에서 정책적 차이가 있었다. 왕은 양파를 연립시켰으나 권력의 핵심을 장악한 것은 노론으로서, 송시열과 삼척으로 불리던 왕실의 외척, 즉 [[김석주]] · [[김만기 (조선)|김만기]] · [[민정중]]이 연합하여 정치를 주도했다.
 
=== 통상 정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