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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과는 가장 가까운 전우였으며, 나이는 이순신보다 5살 어렸지만 계급은 7등급이 앞서갔다.
 
1592년 7월에 한산도해전에[[한산도 대첩|한산도대첩]]에 참전하여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함께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1592년 12월 독산산성 전투에서는 전라병사로서 전라순찰사 [[권율]]과 함께 승첩을 올렸는데 전투에서 크게 부상당하였다. 다음해인 1593년 2월에는 행주산성전투([[행주대첩]])에 부원수 자격으로 참가하여 도원수 권율이 적을 대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9월에는 함안에 주둔하고 있던 적군이 약탈을 일삼고 있었으므로 이를 공격하다가 부상을 당하였다. 그 뒤 충청병사에 올랐다.
 
이후 한산도에 내려와서는 이순신을 도와 둔전을 일으켜 군대의 식량을 비축하여 공을 세운 바도 있고, 1594년 9월에는 이순신과 함께 장문포(長門浦))에서 일본군을 맞아서 승전, 공을 세웠다.(장문포 해전) 이어 충청수사가 되고 다음해 황해병사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남해·상주 등지에서 활약하였으며, 올라오는 [[일본군]]을 격퇴하여 주춤시켰다. [[1598년]] [[울산성 전투|제2차 울산성 전투]]에서 2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양호 (명나라)|양호]](楊鎬)를 도와 싸우다가 [[울산서|울산]]에서 전사하였다.
 
임진왜란의 3대첩중 한산도 대첩과 행주 대첩에서 공을 세운 유일한 장수이다.
 
당시 바다에서는 이순신, 육지에서는 선거이( 유성룡의 기록중에서)라 할만큼 이름이 높았다.
 
1605년 [[선무공신|선무]][[원종공신]]일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추봉되고 보성 오충사(五忠祠), 고양 오충사(五忠祠), 행주서원(행주산성 내)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