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룡: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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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8월 1일]] 부산 방첩대(CIC) 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서울 수복 후에는 부역자를 가려내 처벌하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의 본부장을 맡아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되었다. 대한민국 국군과 국제연합군이 북진할 때 평양지구 특무대장으로 일하다가 1·4후퇴로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 일을 계속했다. 이때 김창룡은 35세의 젊은 나이였지만 이미 권력 실세였다. 그는 수사권을 독점했으며, 이승만과 직통 보고 라인을 갖고 있었다.
 
종전 뒤에도 대통령 [[이승만]]의 각별한 신임 속에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의 각종 공안 사건들을 맡아 처리했다. 그러나 그가 처리한 거의 대부분의 용공 사건, 간첩 사건들은 후에 조작이라는 진술이 나왔다.
 
예를 들어 [[1949년]] 제14연대장 오동기 등이 연루된 인민해방군 사건이나, [[1950년]] 남로당 [[이강국 (정치인)|이강국]]의 연인이라는 [[김수임]]을 체포해 처형한 사건, 소총을 관 속에 숨겨 [[대구광역시|대구]]로 이동하던 불순 분자들을 적발한 사건, [[부산 정치 파동]]의 빌미가 된 부산 금정산 공비 사건 등이 있다.<ref name="idomin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