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정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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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F 사태 ===
{{본문|IMF 구제금융사건}}
1997년 1월부터 한보 철강, [[기아자동차]] 주식회사 등 재벌 기업의 도미노식 부도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나 대통령인 [[김영삼]]은 [[11월 10일]] [[강경식 (1936년)|강경식]] 당시 부총리와의 통화 이전까지 외환위기의 심각성조차 모르고 있었다. [[1997년]] [[12월 5일]] [[대한민국]]이 외환위기를 겪으며 [[국제통화기금]]에 자금지원을 신청하며 경제 정책의 실패를 자인하였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의 경제가 큰 위기를 겪게 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국제통화기금]]에서 요구하는 조건들을 수행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회사들의 부도 및 경영 위기를 초래 하였고 대량 해고와 장기적인 경기 악화로 인해 온 국민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여당이던 [[신한국당]](현 [[새누리당]])은 대선에서 패배하여 정권교체가 되었다.
 
1997년 7월, [[기아자동차]]가 부도위기에 빠져 대한민국 경제에 큰 충격을 줬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07,1,list1,15.html] 1997.7.15 mbc뉴스데스크</ref> 정부의 기아차사태와 대기업 연쇄부도에 대한 미온적인 대응으로 경제는 더더욱 수렁에 빠졌고<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0301_6187.html 정부, 기아사태 방치해 두었냐는 비난 면하기 어려워] 1997.10.22 mbc뉴스데스크</ref> 10월이 되자 아시아의 연쇄적인 금융위기로 한국도 IMF사태라는 위기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왔고 종합주가지수는 500포인트 밑으로 추락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0460_6187.html 주가 5년만에 폭락] 1997.10.30 mbc뉴스데스크</ref>
 
11월이 되자 상황은 더더욱 심각해져 11월 18일, 환율은 달러당 1000원선을 훨씬 뛰어넘어 거래가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졌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1111_6187.html 이틀째 환율 폭등해 1027원까지 올라가면서 모든 거래 중단] 1997.11.18 mbc뉴스데스크</ref> 상황이 심각해지자 11월 19일, 김영삼은 경제팀 일부를 개편하고 [[강경식 (1936년)|강경식]] 경제부총리를 경질하고 통상산업부 장관이었던 [[임창열]]을 경제부총리에 임명한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1,1,list1,19.html] 1997.11.19 mbc뉴스데스크</ref> 그날 임창열 부총리는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환율제한폭을 사실상 철폐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1149_6187.html 외환시장 안정위해 환율 변동폭 대폭 확대] 1997.11.19 mbc뉴스데스크</ref> mbc와의 회견에서 임창열은 "우리 경제의 외환보유고가 10월말 현재 300억불에 달하고 수출이 10월부터 흑자기조로 바뀌면서 그런 면에서는 수출이 흑자가 나고, 다만 우리 국민들이 외환을 좀 아껴쓰셔서 여행이라던 지 해외 유학이라든지 이런 비용을 줄이는데 동참해 주시면 무역외 수지도 적자를 대폭 감축해서 외국에서 돈을 덜 빌리고도 경제 운영이 가능할 것"이라며 IMF구제 금융 가능성에 대해서는 "IMF 차관들을 얘기하시는데 IMF라는 데는 돈을 그냥 빌려주는데 가 아닙니다. IMF에서 돈을 빌려 줄 때는 정책의 조정을 그것도 강도 높게 조건을 붙여서 돈을 빌려줍니다. 그렇게 되면 은 지금 외국에서 우리를 보기를 금융 감독이 제대로 되고 있지를 않다 이렇게 지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융 감독을 포함해서 금융 개혁 법안은 반드시 조기에 확정이 되어서 국제 신뢰도를 높일 수 있는 대책이 서야 된다고 믿습니다."라는 발언으로 IMF구제금융에 대한 가능성은 사실상 부인한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1153_6187.html 임창열 신임 경제 부총리에게 듣는다] 1997.11.19 mbc뉴스데스크</ref>
 
그러나 다음날인 1997년 11월 20일, 환율은 제한폭을 철폐하자마자 환율은 무려 100원이상 폭등하는 사태가 벌어진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1196_6187.html 환율이 계속 치솟아 오늘 환율 1139원] 1997.11.20 mbc뉴스데스크</ref> 11월 21일,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1,1,list1,21.html] 1997.11.21 mbc뉴스데스크</ref> 임창열 총리와 스탠리피셔 IMF부총재는 1시간 가량 밀담을 나누며 IMF구제금융에 대하여 논의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1227_6187.html 임창열 경제 부총리와 IMF부총리의 긴박했던 협상] 1997.11.21 mbc뉴스데스크</ref> 그날 각 언론사마다 IMF가 뭐냐는 시민들의 항의와 투서가 빗발쳤고, 다음날 정부는 IMF에 200억달러의 차관을 요청한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1262_6187.html 정부, IMF에 200억 달러 공식 요청하기로 결정] 1997.11.22 mbc뉴스데스크</ref> 11월 29일, 종합주가지수는 사상최악인 400포인트 이하로 추락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1569_6187.html 주가 한때 400선 붕괴, 누구도 주가 예측 못해] 1997.11.29 mbc뉴스데스크</ref> 11월 30일, 정부는 IMF와 협상을 벌였다. IMF의 지원조건은 저성장과 고실업이었고 이를 시행하라며 한국정부를 압박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1,1,list1,30.html] 1997.11.30 mbc뉴스데스크</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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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민정부 제7기 내각(제6차 개각) ===
 
1997년 2월 한보그룹 부도 이후 한보그룹에 대한 제일은행 등의 대출에 [[김영삼]] 대통령의 둘째 아들 [[김현철 (1959년)|김현철]] 씨가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또한 [[한보그룹]] 관련 정계 스캔들에 [[김우석]] 내무부 장관이 연루되는 등 한보그룹 관련 정치 스캔들로 인하여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도가 급락하였으며, 김영삼 대통령은 김영삼정부 출범 이후 최대 위기에 봉착하였다. 이에 따라 [[김영삼]] 대통령은 국무총리를 포함하여 7개 부처 장관을 경질하는 중폭 개각을 단행하였는데, [[이수성]] 총리가 경질되고 후임에 [[고건]] 전 서울시장이, [[경제부총리]]로 [[강경식 (1936년)|강경식]]이 내정되었다.
 
=== 문민정부 제8기 내각(제7차 개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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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각 ====
1997년 11월 외환위기 직전에 [[강경식 (1936년)|강경식]] 경제부총리가 경질되고 후임에 [[임창렬]]이 내정되는 등 일부 부처의 개각이 단행되었다.
 
== 평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