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무 천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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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출생 ===
[[조메이 천황]]
==== 탄생년도에 대한 의문 ====
덴무 천황의 삶과 업적에 대한 기록은 《[[일본서기]]》 덴무기(天武紀) 밖에 없다. 하지만 이 역사서는 그의 부인과 아들이 다스리고 있을 때 덴무 천황의 아들이 쓴 것이기 때문에 기록의 정확성에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가마쿠라 시대]]
그런데 패전 뒤, 계도상 아버지가 조메이 천황으로서 덴지 천황의 남동생으로 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덴무 천황은 덴지 천황의 이복형(내지는 아버지가 다른 형)이었던 것이 아닐까 주장하는 학설이 등장하게 되었다.<ref>덴지 천황과 덴무 천황은 실제 형제가 아니라는 비형제설이나, 생모인 고교쿠 천황이 조메이 천황과 혼인하기 전에 혼인했었던 다카무코 왕(高向王)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야노 미코(漢皇子)와 덴무 천황이 서로 동일 인물은 아닐까 하는 이부형설이 유명하다.</ref> 다만 위에서 말한 사료들 안에서, 덴지 천황을 덴무 천황보다 연하로 적은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덴지 천황의 생년에 대한 사료비판을 차치하고 덴무 천황의 생년만 계산해서 그만큼을 《일본서기》에 기록된 덴지 천황의 생년과 비교한다, 고 했을 때 역전이 생긴다는 것이다.<ref>덴지 천황에 대해서도 생년과 몰년에 대해서는 여러 설들이 존재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덴지 천황]] 참조.</ref> 어쨌든 덴무 천황의 정확한 생년은 미상이다.
《일본서기》 이외의 주요 사료에 기록된 덴지 천황과 덴무 천황의 생년은 다음과 같다.
<table class="wikitable" border="1" cellspacing="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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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의 유래 ====
덴무 천황의 휘는 오아마(大海人)이다. 어려서
일본식 시호는 '''아마노누나하라오키노마히토노스메라미코토'''('''{{llang|ja|天渟中原瀛真人天皇}}'''). 「오키(瀛)」는 중국 [[도교]]에서 말하는 동방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마히토({{llang|ja|眞人}})」란 뛰어난 도사를 뜻하며 모두 도교적인 단어에서 따온 것이다. 중국풍 시호인 「덴무(天武)」는 역대 천황들과 마찬가지로 [[나라 시대]]
=== 사이메이 천황의 죽음까지 ===
=== 덴지 천황의 즉위와 황태제(皇太弟) 책봉 ===
사이메이 천황이 죽은 뒤, 나카노오에는 즉위식을 행하지 않고 칭제의 형식으로 통치했다. 덴지 3년([[664년]]) 2월 9일에,
7년([[668년]]) 1월 7일, 나카노오에는 비로소 즉위식을 거행했다. 《일본서기》 권28 덴무 천황 즉위전기에는 이때 오아마가 동궁이 되었다고 기록했으나, 같은 책의 권27 덴지키(天智紀)에는 이 기록이 없다. 덴지키 안에서 오아마는 「대황제(大皇弟)」, 「동궁태황제(東宮太皇弟)」, 「동궁(東宮)」 등으로 기록된다. 《일본서기》는 임신의 난 이전부터 오아마를 '천황'으로 적는 등, 그의 지위에 관해서는 신뢰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때문에 기록대로 오아마가 처음부터 황태자의 지위였다고 보는 학자도 있지만, 「대황제」 등의 단어는 임신의 난으로 정권을 찬탈한 덴무 천황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식으로 실제로는 그러한 지위가 아니었다는 설, 단순한 존칭일 뿐 황위계승 예정자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설 등, 오아마의 황태자 책봉 사실을 의심하는 설도 유력하다.
그가 황위 계승자로 인정되고 있었는가 어쨌는가의 문제를 떠나, 일단 덴지 천황의 조정에서 그가 매우 중요한 역할들을 수행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가 그렇게 좋았던 것 같지도 않다. [[후지와라 씨]]
덴지 10년([[671년]]) 1월 2일, 덴지 천황은 아들 [[고분 천황|오토모노 미코]](大友皇子)를 [[태정대신]](太政大臣)으로 임명하고, [[좌대신]](左大臣) · [[우대신]](右大臣)과 [[어사대부]](御史大夫)를 보좌로 붙였다(《해동제국기》). 태정대신은 국정을 총람하는 관직으로서 그 직무는 기왕에
=== 임신의 난 ===
《일본서기》에 따르면, 덴지 천황은 병이 깊어진 10년([[671년]]) 10월 17일에 오아마를 병상에 불러 "내 병이 심하니 뒷일은 너에게 맡기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미리 측근인 [[소가노 야스마로]](蘇我安麻呂)의 경고를 받은 오아마는 "황후(야마토히메노 황후)에게 즉위하게 하시고 오토모에게 여러 정사를 행하게 하소서. 신은 천황을 받들어 출가수도하고자 합니다."라며 사양했다. 그리고 그 날 오아마는 삭발하고 요시노(吉野, 지금의 일본 [[나라현]])로 낙향했다. 요시노에서 그는 우노노사가라노 히메미코와 [[구사카베 황자]] 등의 가족, 소수의 사인과 궁녀를 거느리고 은둔생활을 했다고 한다. 한편 오미의 오쓰노미야(大津宮, 오늘날의 일본 [[오쓰 시]])에서는 덴지 천황의 뒤를 이어 오오토모가 조정의 일을 맡아 후계가 되었다.(다만 즉위했는지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이듬해인 [[672년]] 6월 22일, 오아마는 요시노에서 거병을 결의하고, 무라쿠니노 오요리(村國男依) 등을 [[미노 국|미노]]에 사자를 파견했다. 그리고 이틀 뒤 그 자신은 몇 명의 측근만을 거느린 채 뒤를 따랐다. 오아마는 후와(不破)의 길을 봉쇄해 오미 조정과 도고쿠(東國) 사이의 연락을 차단한 뒤, 군사를 일으키는 사자를 히가시야마(東山, [[시나노 국|시나노]] 등지)와 도카이의 [[오와리 국|오와리]] 등지에 보냈다. 그리고 야마토 분지에서 오토모노 후케이(大伴吹負)가 거병, 아스카의 야마토쿄(倭京)을 급습해 점령했다. 이윽고 도고쿠에서 수만의 군세가 후와에 집결, 오미와 야마토 두 길로 진군했다. 오미 방면으로 진군한 군세가 [[비와 호]] 동쪽을 돌아 [[세키가하라 정|세키가하라]]를 비롯한 각지에서 조정측 군사들을 수차례 격파한 끝에, 7월 23일 오토모는 자결하고 난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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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모가 죽은 뒤에도 오아마는 한동안 미노에 머무르며 전후 처리를 모두 끝낸 다음에야 아스카의 시마 궁(島宮)을 거쳐 오카모토 궁(岡本宮)에 들어갔다. 여기에 더해 동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새로이 대극전(大極殿)을 지었다(두 궁을 아울러 아스카 기요미하라 궁이라 이름붙인 것은 만년의 일). [[673년]] 2월 27일에 즉위식을 거행한 천황은 우노노사라라노 히메미코를 황후로 삼고<ref>황후는 이미 임신의 난 때부터 정치에 대한 여러 가지 사항을 그에게 조언했다</ref>, 재위 기간에 한 명의 대신도 두지 않고 자신이 직접 정무를 살폈다.<ref>조정의 요직은 주로 황족들이 맡았는데, 이것을 황친정치라고 한다.</ref> 또한 천황은 딸 오쿠노 히메미코(大来皇女)를 [[사이오]]로서 [[이세 신궁]]을 모시게 하고<ref>이세 신궁에 대해서는 임신의 난을 승리로 이끌게 도와주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ref>, 앞서 조메이 천황이 지었던 백제대사(百濟大寺)를 옮겨 다카이치노오데라(高市大寺)로 삼는 등 신도와 불교를 아울러 진흥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덴무 천황의 여러 정책은 아래에 설명하였다.
황자들이 성장하자 덴무 8년([[679년]]) 5월 5일에 황후와 덴무 천황 소생 4명, 덴지 천황 소생의 2명과 함께 요시노노미야로 가서 6일에 그곳에서 천황과 황후는 여섯 명을 한 부모를 둔 자식처럼 대우하고 자식들끼리는 서로 협력한다는, 요시노 맹약을 행했다. 하지만 6명은 평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고, 구사카베노 황자가 첫 번째, 오오쓰 황자가 다음, 가장 연장자였던 [[다케치 황자]]
천황과 황후는 덴무 10년([[681년]]) 2월 25일에 율령을 정할 계획을 세웠고, 동시에 구사카베노 황자를 황태자로 세웠다. 하지만 12년([[683년]]) 2월 1일부터는 오쓰 황자에게도 조정의 일을 맡게 했다. 오오쓰 황자는 여러 가지 재능이 많다는 칭송이 있었다. 재위 14년만인 덴무 15년([[686년]]) 5월 24일, 덴무 천황은 병을 얻었다. 불법의 영험을 빌어 쾌유를 빌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고, 황후와 황태자에게 7월 15일에 정치를 위임했다. 7월 20일에는 새로운 연호가 슈초(朱鳥)로 정해졌다. 그 뒤로도 신불에 쾌유를 비는 것은 이어졌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이, 9월 11일에 덴무 천황은 숨을 거두었다.
=== 장례와 능묘 ===
덴무 천황이 죽고 한 달이 지난 10월 2일에 오오쓰노 황자가 모반 혐의로 붙잡혀 바로 다음날 처형되었다. 빈소에 모셔진 시신은 오랫동안 매장되지 않고, 황태자가 백관을 인솔해 몇 번이나 의식을 반복해 지토 2년([[688년]]) 11월 21일에야 오우치 능(大内陵)에 묻혔다. 지토 3년([[689년]]) 3월 13일에 구사카베 황태자가 죽었으므로, 황후 우노노사라라노 히메미코가 천황으로 즉위했다(지토 천황). 능은 히노키기미오우치 능(檜隈大内陵, 지금의 일본 나라 현 [[다카이치 군]] 아스카무라 오오치노구치), 노구치 오우노하키(野口王墓) 고분. 지토 천황의 무덤과 함께 조성된 부부합장릉이다. 일본 고대 천황의 능으로서는 드물게 그 능묘 비정에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여겨지지만, 가마쿠라 시대인 [[분랴쿠]]
== 업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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