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무 천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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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출생 ===
[[조메이 천황]](舒明天皇)과 [[고교쿠 천황]](皇極天皇)의 아들로 태어났다. 훗날 덴지 천황으로 즉위하게 되는 나카노오에 황자(中大兄皇子)와는 동복형제 사이다. 황후 우노노사가라노 히메미코(鸕野讃良皇女)는 후에 [[지토 천황]](持統天皇)으로 즉위했다.
 
==== 탄생년도에 대한 의문 ====
덴무 천황의 삶과 업적에 대한 기록은 《[[일본서기]]》 덴무기(天武紀) 밖에 없다. 하지만 이 역사서는 그의 부인과 아들이 다스리고 있을 때 덴무 천황의 아들이 쓴 것이기 때문에 기록의 정확성에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에 성립된 《일대요기》(一代要記)나 《본조황윤소운록》(本朝皇胤紹運録), 《황년대략기》(皇年代略記)에는 그의 사망년도가 조금씩 다르게 기재되어 있는데, 이것을 기준으로 그의 탄생년도를 거슬러 계산해보면 [[스이코 천황]](推古天皇) 30년([[622년]])과 31년([[623년]])이 나온다. 이는 《일본서기》에 그의 형이라 기재된 덴지 천황보다도(스이코 천황 34년) 훨씬 앞서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일본 사람들은 《일대요기》를 필사하는 과정에서 56(五十六)을 65(六十五)로 잘못 기재한 것으로 보고, 덴무 천황의 탄생년도는 이를 기준으로 역산해서 [[631년]]이라고 여겨왔다.
 
그런데 패전 뒤, 계도상 아버지가 조메이 천황으로서 덴지 천황의 남동생으로 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덴무 천황은 덴지 천황의 이복형(내지는 아버지가 다른 형)이었던 것이 아닐까 주장하는 학설이 등장하게 되었다.<ref>덴지 천황과 덴무 천황은 실제 형제가 아니라는 비형제설이나, 생모인 고교쿠 천황이 조메이 천황과 혼인하기 전에 혼인했었던 다카무코 왕(高向王)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야노 미코(漢皇子)와 덴무 천황이 서로 동일 인물은 아닐까 하는 이부형설이 유명하다.</ref> 다만 위에서 말한 사료들 안에서, 덴지 천황을 덴무 천황보다 연하로 적은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덴지 천황의 생년에 대한 사료비판을 차치하고 덴무 천황의 생년만 계산해서 그만큼을 《일본서기》에 기록된 덴지 천황의 생년과 비교한다, 고 했을 때 역전이 생긴다는 것이다.<ref>덴지 천황에 대해서도 생년과 몰년에 대해서는 여러 설들이 존재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덴지 천황]] 참조.</ref> 어쨌든 덴무 천황의 정확한 생년은 미상이다.
 
《일본서기》 이외의 주요 사료에 기록된 덴지 천황과 덴무 천황의 생년은 다음과 같다.
 
<table class="wikitable" border="1" cellspacing="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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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의 유래 ====
덴무 천황의 휘는 오아마(大海人)이다. 어려서 오아마 씨오아마씨(凡海氏)<ref>가이후 일족의 도모노 미야쓰코</ref> 로부터 양육받은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일본서기》에 직접적으로 그렇게 휘를 적은 것은 아니지만, 덴무 천황이 죽었을 때 그의 빈소에서 오아마노 아라카마(凡海麁鎌)가 임생(壬生)를 뇌한 것에서 이렇게 추측한다.
 
일본식 시호는 '''아마노누나하라오키노마히토노스메라미코토'''('''{{llang|ja|天渟中原瀛真人天皇}}'''). 「오키(瀛)」는 중국 [[도교]]에서 말하는 동방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마히토({{llang|ja|眞人}})」란 뛰어난 도사를 뜻하며 모두 도교적인 단어에서 따온 것이다. 중국풍 시호인 「덴무(天武)」는 역대 천황들과 마찬가지로 [[나라 시대]](奈良時代)에 [[오우미노 미후네]]에 의해 찬진되었다. 근대에 [[모리 오가이]]는 중국의 《[[국어 (역사서)|국어]]》(國語) 초어(楚語) 하(下)에 나오는 「천사(天事)는 무(武), 지사(地事)는 문(文), 민사(民事)는 충(忠) · 신(信)이라」라는 구절에서 「덴무」라는 시호가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로 [[전한]](前漢)의 [[한 무제|무제]](武帝)를 모방했다는 설과 「하늘이 [[주 무왕|무왕]](武王)을 세워 나쁜 왕([[주왕]])을 멸했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 사이메이 천황의 죽음까지 ===
오오아마의오아마의 아버지인 [[조메이 천황]]은 그가 아직 어렸을 때 죽었다. 형인 나카노오에가 고교쿠 4년(645년) 6월 12일에 20세의 나이로 을사의 변을 일으켜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를 참살했을 때, 오오아마는오아마는 나이가 어려 음모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사건의 결과로 소가씨 본종가는 몰락하고 퇴위한 [[고교쿠 천황]]의 뒤를 이어 [[고토쿠 천황]]이 즉위했다. 그 뒤 [[하쿠치]] 4년(653년)에 고토쿠 천황이 사이가 틀어진 나카노오에가 [[나니와(難波)]]에서 야마토(倭)로 옮길 때 행동을 함께 했었다.<ref>《일본서기》하쿠치 4년조. 이하 사실도 기본적으로 《일본서기》를 따라 기록한다.</ref> 이윽고 고토쿠 천황이 병으로 죽자, 퇴위했던 고교쿠 천황이 복위하여 [[사이메이 천황]]이 되었다.
 
오오아마는오아마는 황태자가 된 형 나카노오에의 딸을 차례대로 네 명까지 아내로 맞이했다. 백제 부흥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원병 파병문제로 어머니 사이메이 천황과 형 나카노오에가 지쿠시(筑紫)로 궁을 옮길 때 오오아마도오아마도 아내를 데리고 함께 갔다. 그 여행중인 사이메이 7년(661년) 1월 8일에, 아내 오타노 히메미코(大田皇女)는 오쿠노우미(大伯海)<ref>지금의 일본 [[오카야마현]] 동부에 해당하는 곳이다.</ref> 에서 딸 오오쿠노 히메미코(大伯皇女)를 낳았다. 다른 황자인 오오쓰 황자(大津皇子)의 이름도 지쿠시의 나오쓰(娜大津)<ref>지금의 일본 [[후쿠오카 시후쿠오카시]]이다.</ref> 에서 태어난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또한 왕녀 누카타(額田)를 아내로 삼아 자식을 두었는데, 누카타노 오키미는 나중에 나카노오에의 왕비가 되었다. 이 삼각 관계가 훗날 형제가 불화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찬반 양론이 있다.
 
=== 덴지 천황의 즉위와 황태제(皇太弟) 책봉 ===
사이메이 천황이 죽은 뒤, 나카노오에는 즉위식을 행하지 않고 칭제의 형식으로 통치했다. 덴지 3년([[664년]]) 2월 9일에, 오오아마는오아마는 나카노오에의 명으로 관위 26계제를 시행하고, 우지카미(氏上)을 인정하며 민부(民部)와 가부(家部)를 정하는 것을 군신에게 선포했다. 덴지 6년([[667년]]) 2월 27일에 간신히 사이메이 천황의 장례 의식이 이루어졌는데, 하시히토노 히메미코(間人皇女)가 사이메이 천황과 합장되었고 오타노 히메미코가 그 능 앞에 묻혔다. 모두 오오아마에게는 어머니, 누나(혹은 여동생) 그리고 아내에 해당하는 이들이었다.
 
7년([[668년]]) 1월 7일, 나카노오에는 비로소 즉위식을 거행했다. 《일본서기》 권28 덴무 천황 즉위전기에는 이때 오아마가 동궁이 되었다고 기록했으나, 같은 책의 권27 덴지키(天智紀)에는 이 기록이 없다. 덴지키 안에서 오아마는 「대황제(大皇弟)」, 「동궁태황제(東宮太皇弟)」, 「동궁(東宮)」 등으로 기록된다. 《일본서기》는 임신의 난 이전부터 오아마를 '천황'으로 적는 등, 그의 지위에 관해서는 신뢰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때문에 기록대로 오아마가 처음부터 황태자의 지위였다고 보는 학자도 있지만, 「대황제」 등의 단어는 임신의 난으로 정권을 찬탈한 덴무 천황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식으로 실제로는 그러한 지위가 아니었다는 설, 단순한 존칭일 뿐 황위계승 예정자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설 등, 오아마의 황태자 책봉 사실을 의심하는 설도 유력하다.
 
그가 황위 계승자로 인정되고 있었는가 어쨌는가의 문제를 떠나, 일단 덴지 천황의 조정에서 그가 매우 중요한 역할들을 수행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가 그렇게 좋았던 것 같지도 않다. [[후지와라 씨]](藤原氏)의 집안 전승인 《도지 가전(藤氏家傳)》에 보면, 어느 날 궁에서 벌어진 연회에서 취기로 형왕(兄王)에 대한 감정이 격해진 오아마가 장창을 가져다 덴지 천황이 보는 앞에서 상판(床板)에 꽂았으며, 격노한 덴지 천황이 그를 죽이려는 것을 [[내대신]](內大臣)이던 [[후지와라노 가마타리]](藤原鎌足)의 만류로 무사했다고 전한다. 이 일은 덴지 천황 7년([[668년]])의 일로 추측되고 있다.
 
덴지 10년([[671년]]) 1월 2일, 덴지 천황은 아들 [[고분 천황|오토모노 미코]](大友皇子)를 [[태정대신]](太政大臣)으로 임명하고, [[좌대신]](左大臣) · [[우대신]](右大臣)과 [[어사대부]](御史大夫)를 보좌로 붙였다(《해동제국기》). 태정대신은 국정을 총람하는 관직으로서 그 직무는 기왕에 오오아마가오아마가 해온 일들과도 겹치는 것이었다. 《일본서기》는 이 직후에 「동궁태황제가 관위 · 법도를 시행시켰다」고 적었지만, 「어떤 책에 이르기로는(或本云)」 하고 운을 떼며 오오토모가오토모가 이것을 했다고 주하고 있다. 또한 《회풍조》(懐風藻)는 오오토모가오토모가 덴지 10년에 황태자가 되었다고 적었다. 일본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일본서기》에 주석으로 달린 「어떤 책」 쪽을 택하거나, 이 기사를 덴지 3년([[664년]]) 2월 9일의 관위 26층제의 중출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오오토모의오토모의 태정대신 임명과 더불어 오아마는 조정으로부터 사실상 완전히 소외된 것으로 보인다. 오토모가 태정대신으로서 오오아마의오아마의 직무를 행하게 된 것은 오토모에게 황위를 잇게 하려는 덴지 천황의 의도가 강하게 표출된 것이라는 데에는 반론이 없다.
 
=== 임신의 난 ===
《일본서기》에 따르면, 덴지 천황은 병이 깊어진 10년([[671년]]) 10월 17일에 오아마를 병상에 불러 "내 병이 심하니 뒷일은 너에게 맡기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미리 측근인 [[소가노 야스마로]](蘇我安麻呂)의 경고를 받은 오아마는 "황후(야마토히메노 황후)에게 즉위하게 하시고 오토모에게 여러 정사를 행하게 하소서. 신은 천황을 받들어 출가수도하고자 합니다."라며 사양했다. 그리고 그 날 오아마는 삭발하고 요시노(吉野, 지금의 일본 [[나라현]])로 낙향했다. 요시노에서 그는 우노노사가라노 히메미코와 [[구사카베 황자]] 등의 가족, 소수의 사인과 궁녀를 거느리고 은둔생활을 했다고 한다. 한편 오미의 오쓰노미야(大津宮, 오늘날의 일본 [[오쓰 시]])에서는 덴지 천황의 뒤를 이어 오오토모가 조정의 일을 맡아 후계가 되었다.(다만 즉위했는지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이듬해인 [[672년]] 6월 22일, 오아마는 요시노에서 거병을 결의하고, 무라쿠니노 오요리(村國男依) 등을 [[미노 국|미노]]에 사자를 파견했다. 그리고 이틀 뒤 그 자신은 몇 명의 측근만을 거느린 채 뒤를 따랐다. 오아마는 후와(不破)의 길을 봉쇄해 오미 조정과 도고쿠(東國) 사이의 연락을 차단한 뒤, 군사를 일으키는 사자를 히가시야마(東山, [[시나노 국|시나노]] 등지)와 도카이의 [[오와리 국|오와리]] 등지에 보냈다. 그리고 야마토 분지에서 오토모노 후케이(大伴吹負)가 거병, 아스카의 야마토쿄(倭京)을 급습해 점령했다. 이윽고 도고쿠에서 수만의 군세가 후와에 집결, 오미와 야마토 두 길로 진군했다. 오미 방면으로 진군한 군세가 [[비와 호]] 동쪽을 돌아 [[세키가하라 정|세키가하라]]를 비롯한 각지에서 조정측 군사들을 수차례 격파한 끝에, 7월 23일 오토모는 자결하고 난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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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모가 죽은 뒤에도 오아마는 한동안 미노에 머무르며 전후 처리를 모두 끝낸 다음에야 아스카의 시마 궁(島宮)을 거쳐 오카모토 궁(岡本宮)에 들어갔다. 여기에 더해 동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새로이 대극전(大極殿)을 지었다(두 궁을 아울러 아스카 기요미하라 궁이라 이름붙인 것은 만년의 일). [[673년]] 2월 27일에 즉위식을 거행한 천황은 우노노사라라노 히메미코를 황후로 삼고<ref>황후는 이미 임신의 난 때부터 정치에 대한 여러 가지 사항을 그에게 조언했다</ref>, 재위 기간에 한 명의 대신도 두지 않고 자신이 직접 정무를 살폈다.<ref>조정의 요직은 주로 황족들이 맡았는데, 이것을 황친정치라고 한다.</ref> 또한 천황은 딸 오쿠노 히메미코(大来皇女)를 [[사이오]]로서 [[이세 신궁]]을 모시게 하고<ref>이세 신궁에 대해서는 임신의 난을 승리로 이끌게 도와주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ref>, 앞서 조메이 천황이 지었던 백제대사(百濟大寺)를 옮겨 다카이치노오데라(高市大寺)로 삼는 등 신도와 불교를 아울러 진흥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덴무 천황의 여러 정책은 아래에 설명하였다.
 
황자들이 성장하자 덴무 8년([[679년]]) 5월 5일에 황후와 덴무 천황 소생 4명, 덴지 천황 소생의 2명과 함께 요시노노미야로 가서 6일에 그곳에서 천황과 황후는 여섯 명을 한 부모를 둔 자식처럼 대우하고 자식들끼리는 서로 협력한다는, 요시노 맹약을 행했다. 하지만 6명은 평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고, 구사카베노 황자가 첫 번째, 오오쓰 황자가 다음, 가장 연장자였던 [[다케치 황자]](高市皇子)가 세 번째로 맹세했으며 이 서열은 덴무 천황의 치세 내내 유지되었다. 덴지 천황의 소생은 황태자 자리에서 밀려났지만 덴무 천황의 소생인 구사카베는 덴지 천황의 딸 아베노 히메미코(阿閉皇女, 훗날의 [[겐메이 천황]])와 혼인했고, 오오쓰는 야마베 황녀(山辺皇女)와 혼인했다. 덴지 천황의 소생인 가와시마 황자(河島皇子)는 덴무 천황의 딸인 하쓰세베 황녀(泊瀬部皇女)와 결혼했다.<ref>덴무 천황의 황후도 덴지 천황의 딸이었기에, 덴지 · 덴무 양계는 중첩적인 근친혼관계로 서로 엮인 셈이다.</ref>
 
천황과 황후는 덴무 10년([[681년]]) 2월 25일에 율령을 정할 계획을 세웠고, 동시에 구사카베노 황자를 황태자로 세웠다. 하지만 12년([[683년]]) 2월 1일부터는 오쓰 황자에게도 조정의 일을 맡게 했다. 오오쓰 황자는 여러 가지 재능이 많다는 칭송이 있었다. 재위 14년만인 덴무 15년([[686년]]) 5월 24일, 덴무 천황은 병을 얻었다. 불법의 영험을 빌어 쾌유를 빌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고, 황후와 황태자에게 7월 15일에 정치를 위임했다. 7월 20일에는 새로운 연호가 슈초(朱鳥)로 정해졌다. 그 뒤로도 신불에 쾌유를 비는 것은 이어졌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이, 9월 11일에 덴무 천황은 숨을 거두었다.
 
=== 장례와 능묘 ===
덴무 천황이 죽고 한 달이 지난 10월 2일에 오오쓰노 황자가 모반 혐의로 붙잡혀 바로 다음날 처형되었다. 빈소에 모셔진 시신은 오랫동안 매장되지 않고, 황태자가 백관을 인솔해 몇 번이나 의식을 반복해 지토 2년([[688년]]) 11월 21일에야 오우치 능(大内陵)에 묻혔다. 지토 3년([[689년]]) 3월 13일에 구사카베 황태자가 죽었으므로, 황후 우노노사라라노 히메미코가 천황으로 즉위했다(지토 천황). 능은 히노키기미오우치 능(檜隈大内陵, 지금의 일본 나라 현 [[다카이치 군]] 아스카무라 오오치노구치), 노구치 오우노하키(野口王墓) 고분. 지토 천황의 무덤과 함께 조성된 부부합장릉이다. 일본 고대 천황의 능으로서는 드물게 그 능묘 비정에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여겨지지만, 가마쿠라 시대인 [[분랴쿠]](文曆) 2년([[1235년]])에 도굴당해 대부분의 부장품을 도둑맞았다. 관도 외부 공기에 노출되었지만 유해는 그대로 보전되었는데, 천황의 두개골에 그때까지도 흰 머리카락의 흔적이 남아 붙어 있었다고 한다. 지토 천황의 유골은 화장되어 은으로 만든 유골함에 담겨져 있었지만, 유골함만 도굴범이 훔쳐가고 유골은 근처에 아무렇게나 내버려졌다. [[후지와라노 사다이에]](藤原定家)의 일기 《메이게쓰키》(明月記)에 도굴의 전말이 실려 있다. 또한 도굴당했을 때 작성된 《아후노야마료우키》(阿不幾乃山陵記)에 석실의 모습이 실려 있다.
 
== 업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