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내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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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서 ==
*〈갑골문을 통해 본 은왕조의 숭신사상과 왕권변천〉, 《사학지》 제9집, 1975
*〈은족의 동북방기원설에 대한 검토〉, 《학술논총》 제1집, 1976
*〈은문화의 경제적 기반에 대하여: 농경을 중심으로〉, 《사학지》 제10집, 1976
*〈상족의 시조 설화 검토〉, 《학술논총》 제2집, 1978
*《상왕조사의 연구》, 경인문화사, 1978
*〈중국의 신석기시대 소고〉, 《사학지》 제15집, 1981
*〈중국에 있어서 무리사회의 전개〉, 《동양학》 제11집, 1981
*〈상왕국의 국가구조와 사회성격〉, 《사학지》 제16집, 1982
*《중국의 원시시대》, 단국대학교출판부, 1982
*〈기자신고〉, 《한국사연구》 41호, 1983
*《상주사》, 민음사, 1984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군사》 제8호, 1984
*〈고조선의 강역〉, 《한국학》 제7권 제3호, 1984
*〈위만조선의 재인식〉, 《사학지》 제19집, 1985
*《한국 고대의 국가와 사회(공저)》, 일조각, 1985
*《한국고대사신론》, 일지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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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구의 증언에 따르면 84년 당시 학술세미나에서 윤내현은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와 유사하다는 지적이 있자, 자신이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등 북한 자료를 미국의 대학도서관에서 입수했음을 시인하면서도, 85년 11월 "주를 달면 자신의 학설이 무너진다" 는 말을 남기고 이미 지급된 연구비를 반납하고 자신의 글을 거두어 갔다. 한편 윤내현은 《한국고대사신론》에서 "필자는 민족사학자들의 견해를 수용 · 보완한 북한 학자들의 연구 업적과 그들이 발굴한 자료도 활용하게 될 것이지만 그것을 일일이 주기하지 않을 것이며 대표적인 문헌 몇 권만을 소개하는데 그칠 것이다. 이 점은 분단시대에 있어서 한국 역사학계가 겪고 있는 고통이므로 독자들의 이해 있기를 바란다."라고 언급했던 일이 있는데,<ref>윤내현, 《한국고대사신론》, 일지사, 1986, p.14</ref> 이에 대해서 이형구는 "민족사학자들의 견해를 수용·보완한 북한 학자의 연구 업적과 발굴 자료를 많이 활용하면서도 이에 대한 설명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민족사학자들은 약간의 견해를 피력했을 뿐이지 리지린과 같은 본격적인 연구는 없었다. 또 분단시대의 한국 역사학계가 겪고 있는 고통 때문에 주기를 일일이 달지 않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왜 다른 학자들은 북한의 학술 성과를 주기로 소개한단 말인가? 그리고 역사학계만이 마치 그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처럼 표현하여 일반 독자들의 눈을 가리고 있다. 분단상황은 민족 모두의 고통이지 역사학계만 안고 있는 고통이 아니다. 북한의 자료가 제대로 입수되지 못하고 또 입수하기 어려운 상황이 고통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입수하고 검토하여 활용한 자료를 유독 밝히지 않고 넘어가겠다는 것은 분단상황의 고통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자신의 주장에 영향을 주고 참고로 삼은 타인의 연구 업적을 밝힐 용기가 없으면 글을 발표하지 않는 것이 바른 태도이다."라고 비판하였다.
 
윤내현은 연구비 지원에 대해서 일체 외부기관으로부터 받은 사실이 없다며《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ref>,지식산업사, 2003, p.229.</ref>
 
"역대 어느 정부나 정권 또는 기관이나 집단에서 연구비나 행정지원을 받아 본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