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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8월 및 9월은 평달입니다. 정보출처는 천문연 천문우주지식정보(https://astro.kasi.re.kr/life/pageView/8)에서 변환한 결과입니다. 때문에 제가 바꾼 날짜중 하나인, 명량해전이 발생한 날짜인 만력(萬曆) 25년 정유(丁酉)년 경술(庚戌)월 갑진(甲辰)일은 율리우스일 2304651일, 서기 1597년 10월 26일입니다.
|그림 = 명량 해전.jpg
|설명 = [[회본태합기]]에 수록된 명량 해전도(섬과 육지사이의 좁은 목에서의 전투를 그렸으며 섬은 임하도(林下島)이다.)
|날짜 = [[1597년]] [[10월 25일26일]]([[음력 9월 16일]])
|장소 = 명량해협:임하도(林下島)
|결과 = 조선군의 결정적 승리
}}{{전역상자 정유재란}}
 
'''명량 해전'''(鳴梁海戰) 또는 '''명량 대첩'''(鳴梁大捷)은 [[1597년]](선조 30)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5일26일]])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 13척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 130척 이상을 격퇴한 해전이었다.
 
== 배경 ==
일본 수군은 [[1592년]]의 전훈을 참조하여 내륙으로 깊숙이 진격하기 전에 반드시 [[서해]]의 해상권과 [[전라도]]를 장악하고자 하였다. 이순신이 복귀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13척의 전선만으로는 무력하리라는 것이 일본 수군의 판단이었다. [[이순신]]과 전투에서 이미 패배를 경험한 도도 다카토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칠천량 해전]]의 승리가 일본 수군의 사기를 드높여준 탓이었다. 일본 수군은 압도적인 전력으로 이순신의 수군을 격파할 것을 결의했다.
 
한편, 이순신도 일본 수군의 기동 보고를 받고 명량대첩 직전 날인 [[10월 24일25일]]([[음력 9월 15일]]), 장병들에게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卽生 必生卽死)’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라고 거듭 말하며, 장병들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을 결의하였다.<ref>이순신 지음, 노승석 옮김, “난중일기”</ref>
 
=== 임하도(林下島)에서의 접전(우수영(右水營) 앞바다(前洋))===
 
== 해전 경과 ==
[[10월 16일17일]]([[음력 9월 7일]]) 조선 수군은 벽파진 근처에서 일본 수군과 접전을 하여 물리쳤다. 이에 분한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이 13척뿐임을 알고, 해상의 적 이순신과 조선 수군을 완전히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경성으로 곧장 올라가기로 마음 먹는다. 이에 이순신은 일본군이 조선군을 가볍게 보고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그들을 임하도(林下島) 유인하고자 했다.
[[파일:임하도좁은목.jpg|섬네일|임하도좁은목]]
[[파일:임하도좁은목-울돌목으로들어가는목.jpg|섬네일|임하도의 좁은목-울돌목으로들어가는목]]
<b>“조선 수군 10여 척이 우리 배를 추격하여 군사를 사살하고 배를 불태웠다. 통분할 일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전선들을 모두 불러모아 합세해서 조선 수군을 섬멸하자. 그리고 곧장 경성으로 올라가자."</b>
 
벽파진(碧波津)에서 우수영 앞바다(임하도)로 본진을 옮긴 이튿날인 [[10월 25일26일]]([[음력 9월 16일]]) 새벽 3~4시 경 어란진에서 출병한 일본 수군 130(혹은 200여척)여 척이 7~8시 경 순조(順潮)를 타고 울돌목(鬱陶項)을 지나 임하도(林下島)로 접근했다. 일본 수군 지휘부는 중형 군선인 관선(세키부네)로 진영을 짜고 대열을 맞추며 울돌목(鬱陶項)을 통과하고 있었다. 이때 조류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즉, 일본 수군의 진격 방향이 조류의 흐름과 일치하는 순방향이었다.
이순신은 여러장수(6척의 판옥선 장수)에게 명령하여 임하도의 좁은 목(項)에 닻을 내리고 적이 오기를 기다리게 했다. 그곳을 막음으로써 임하도의 바다는 하나의 큰 포구(浦口)가 된 셈이었다. 일본 수군을 좁은 목(項)과 포구(浦口)에 가두어서 섬멸하려는 것이 이순신의 계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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