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시나트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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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트라는 영화 배우로서도 썩 탄탄한 경력을 쌓았다. 앞서 말한 《지상에서 영원으로》론 아카데미상도 탔으며, 그 후로 1955년 《[[황금팔의 사나이]]》를 찍었고, 1962년 찍은 《[[맨츄리안 켄디데이트 (1962년 영화)|맨츄리안 켄디데이트]]》에서의 연기는 특히나 호평이었다. 《[[도시에서]]》, 《[[아가씨와 건달들]]》, 《[[상류 사회 (1956년 영화)|상류사회]]》, 《[[팔 조이]]》 등 찍은 뮤지컬 영화도 여러 편이다. 여기서 《팔 조이》로는 골든 글로브상도 탄다. 영화 경력이 후반에 접어들 적에는 탐정 역을 많이 맡았는데, 대표적인 게 1967년 영화 《[[토니 로마]]》에서의 역이다. 1971년 [[골든 글로브 세실 B. 데밀상]]을 받았다. 텔레비전계에서는 1950년 [[ABC (미국의 방송사)|ABC]]에서 《[[프랭크 시나트 쇼]]》를 출범하여 사회했으며, 연후로도 60년대까지 브라운관에 모습을 꾸준히 비춰댔다. 또한 시나트라는 1940년대 중엽부터 정계와 대단히 끈끈한 관계를 가져와 [[해리 S. 트루먼]], [[존 F. 케네디]], [[로날드 레이건]] 등 대통령의 선거운동을 이바지했다. 이 뿐만 아니라 마피와와도 연루가 있었다는 혐의로 [[FBI]]의 사찰까지 받았다.
 
시나트라는 악보를 볼 줄은 몰랐을지언정 음악에 대한 이해도가 하 뛰어났다 하며, 또 소싯적부터 음악에 대한 능력을 갈고닦기 위해 되우 노력하였다고 한다. 완벽주의자요 옷맵시 좋기로나 연예에서의 풍채 좋기로나 명성이 높았으며, 항용 제 밴드를 끼어 나 혼자 너 혼자 녹음이 아닌 다함께 녹음해야 한다는 지론을 고지했다. 그 밝고 푸른 눈을 빌려 "지긋한 벽안(Ol' Blue Eyes)"이란 별명도 붙었다. 파란곡절 많은 삶의 시나트라였던지라 여자들과의 치정도 많았는데, 특히나 재취 [[에바 가드너]]와의 일은 두드러진다. 1966년 [[미아 패로]]를 삼취로 1976년 [[바바라 막스]]를 사취로 들였다. 자기 비위를 거슬리는 기자라든지 자기랑 대립각을 세우는 상사라든지와 폭력 분규를 일으키기도 많았다. 1983년 [[케네디 센터 아너스]]에 명예상을 받고 1985년 로널드 레이건에 [[대통령자유훈장]]을 받고 1997년 [[의회자유훈장]]을 받았다. 수탁자상이나 전설상이나 평생공로상을 비롯 합계 11회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타임 (잡지)|타임]]》지 20세기 최대의 영향가 100인 중 일인으로 선택되었다. 사후 미국의 음악평론가 [[로버트 크리스트가우]] 이르되 "20세기 제일가는 가수(the greatest singer of the 20th century)"라 했다.<ref name="Christgau">{{저널 인용|last=Christgau|first=Robert|authorlink=Robert Christgau|year=1998|url=http://www.robertchristgau.com/xg/music/sinatra-det.php|title=Frank Sinatra 1915–1998|journal=Details|accessdate=January 10, 2015}}</ref> 그 표상적 이미지야 지금껏 여일하다.{{sfn|Rojek|2004|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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