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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9년 중국을 재통일한 [[수나라|수 황조]]는 611년까지 20년간 평화([[개황의 치]])를 구가했다. 내부적으로 안정된 수조는 외부 세력인 [[동돌궐]]과 [[고구려]]와 충돌했다. 돌궐의 [[야미 카간]](계민가한)은 수에 복속했지만 고구려는 598년 [[수 문제]]의 원정을 격퇴시키고([[제1차 여수전쟁]]) 계속 복속을 거부했다. 604년 즉위한 [[수 양제]]는 610년 고구려 [[영양왕]]이 입조를 거부하자 재원정을 결심했다.
하지만 고구려 원정은 [[병참]]
양제는 612년 [[요하]]를 건너 그해 봄 고구려 영토에 진입했다([[제2차 여수전쟁]]). 양제는 몸소 군사를 이끌고 [[요동]]의 중심거점인 [[요동성]]을 공략하는 한편, [[우중문]]과 [[우문술]]에게 별동대를 맡겨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 앞에서 수군대총관 [[내호아]]의 해군과 합류, 평양성을 직접 타격하도록 했다. 하지만 양제는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했고, 우중문 별동대는 [[살수 대첩|살수 전투]]에서 고구려의 [[을지문덕]]에게 참패를 당했다. 612년 가을, 양제는 원정을 중단하고 후퇴했다. 이 원정에서 수나라군 30만 명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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